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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사문헌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 외 17인이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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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 외 17인이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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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서지사항
총 35권. 1452년(문종 2) 2월 김종서(金宗瑞) 등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고려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절요’라는 명칭이 붙기는 했으나, 『고려사』를 줄인 책이 아니라 『고려사』와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사서이다.
편찬이 완료된 다음해인 1453년(단종 1) 4월, 1434년(세종 16)에 주조한 갑인자로 출판되었다. 이때 찍은 책은 35권이 35책으로 장정되었다. 몇 질을 인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54질을 집현전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단종실록』에 보인다.
이 초간본의 전질이 일본 재단법인 미장덕천여명회(尾張德川黎明會)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 도서에도 그 일부인 24책이 있다.
중종 때 을해자로 다시 간행되었으며,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규장각본(을해자본)을 대본으로 영인한 바 있고, 이를 1960년 동국문화사에서 다시 영인하였다.
같은 해 일본 가큐슈원[學習院]도요분카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에서는 초간본(갑인자본)인 호사문고본을 영인했으며, 이를 대본으로 다시 197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출판한 바 있다. 1968년 번역본이 동국문화사간의 영인본을 사용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편찬/발간 경위
1392년(태조 1)에 편찬되기 시작해 1395년에 완성된 편년체 역사서인 『고려국사』는 이후 다섯 차례나 개찬되는 과정에서,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로 편찬이 완료되어 1451년(문종 1) 8월 문종에게 바쳐졌다.
그 자리에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김종서는 『고려사』는 열람하기에 불편하니, 새로이 편년체의 사서를 편찬할 것을 건의해 문종의 승낙을 받았다.
이에 5개월만에 김종서 등은 『고려사절요』 35권을 찬진하였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고려사절요』가 편찬된 것은 기왕에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 등 편년체 사서의 편찬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윤회(尹淮)의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나 권제(權踶)의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은 비록 내용상의 문제로 배포되지 못했지만, 둘 다 편년체 사서로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 데 기본자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편찬원칙으로 범례 4개항이 있다. 첫째는 치란흥망에 관계 있는 기사로서 귀감이 될 수 있는 기사는 상세히 기술했으며, 기타는 『고려사』에 실렸으므로 간략히 처리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모든 자료를 실으면 사건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므로, 치란흥망과 관계가 없는 기사는 삭제한다는 것과 정치적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왕과 왕실에 관련된 용어로서 비록 참유(僭踰)한 것이라도 이를 직서하며, 기사를 싣고 뺀 것을 항목별로 제시한 원칙이다. 직서의 원칙은 『고려사』 편찬과 똑같은 방식이며, 수록과 삭제의 원칙을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회(朝會)·제사(祭祀)의 평상적인 일은 이를 못했을 때 기록하고, 임금이 직접 참여한 제사는 기록한다. 임금이 사찰에 행차하거나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도량(道場)을 연 것은 당시 군주들의 일반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 쓰지 않고 각 왕의 처음 기사만 쓰며, 반승(飯僧)이 1천여 명에 이르러 곡식을 많이 소비한 경우에는 반드시 쓴다.
상국(上國)의 사신 내왕은 번거롭더라도 반드시 쓰며, 재이(災異)의 기사는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쓰고, 왕이 사냥을 나간 일은 잦더라도 반드시 쓴다.
대신의 임명·파면과 현사(賢士)의 관계(官界) 진퇴는 상세히 쓰며, 상소문 중 받아들여져 행해진 것과 절실한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에서 군주에게 교훈을 주려는 내용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군주는 조회와 제사를 걸러서는 안 된다는 것, 불교신앙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중국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자연 재이(災異) 등의 하늘의 견책이 나타나면 왕은 이를 경건히 받아들이라는 것, 유희오락을 삼가라는 것, 대신과 현신의 대우를 잘 하라는 것, 충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군주에게 경계시키려 하였다.
셋째 범례에서 우왕은 왕망(王莽)의 예에 따라 원년·2년으로 표시하지 않고 갑자(甲子)의 간지로 써서 토죄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실제 『고려사절요』에서 우왕의 기년(紀年) 표시는 간지로 하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신우(辛禑) 몇 년 등으로 부주(附註)하였다.
넷째는 공양왕 원년 10월 이전은 창왕이 재위했으나 정월부터 공양왕 원년으로 기술하였다. 그렇게 쓴 예로 『자치통감』을 들고 있다. 따라서, 창왕이 즉위한 해의 기사는 우왕 14년조로 기술되고 다음 해는 공양왕 원년으로 기술되어, 창왕의 기년은 기록되지 않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보다 내용에 있어서 소략하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도 있으며, 『고려사』가 세가(世家)·지(志)·열전(列傳)으로 나누어 기술됨으로써 연월(年月)의 기록이 누락된 것이 많은 데 비해, 연·월순으로 기술되었으므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특히, 정치적 사건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는 『고려사』보다 월등히 좋은 자료이다.
그리고 역대 역사가들이 썼던 사론을 모두 실었으므로 사학사상을 연구하는 사학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서이다. 이처럼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를 보완해 주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사절요』의 편찬자 18인은 모두 『고려사』를 편찬한 사람들이고, 편찬 시기가 5개월의 차이밖에 없으므로, 이에 나타나는 역사관도 『고려사』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와 마찬가지로 찬자들의 사론을 써넣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는 후대의 군주로 하여금 정치에 참조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교훈적 성격이 『고려사』에 비해 강하게 반영되었다.
즉, 고려시대 실록에 수록되었던 고려시대 사신(史臣)의 사론, 『국사』에 실렸던 이제현(李齊賢)의 사론,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고려국사』에 써넣었던 사론 등 총 108편의 사론을 실었다. 이는 『고려사』에서 세가에만 34편을 실은 것에 비해 대단히 많은 사론을 실은 것이다.
한편, 『고려사』는 수사의 주체가 군주이기 때문에 군주 중심의 경향이 강하고, 『고려사절요』는 그 주체가 신료(臣僚)이기 때문에 신료 중심의 사서적 성격을 띤다는 설도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의 연구  (변태섭, 삼영사, 1982)

  • 조선전기사학사연구  (한영우,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 「조선전기의 역사서술」(정구복,『창작과 비평』41,1976)

  • 「고려사절요해제」(이기백,『고려사절요』,아세아문화사,1972)

  • 「고려사절요해제」(홍이섭,『국역고려사절요』,민족문화추진회,1968)

  • 「고려사편찬시말」(신석호,『한국사료해설집』,1964)

  • 「고려사절요해제」(김상기,『고려사절요』,동국문화사,1960)

  • 「高麗史節要解題」(末松保和,『高麗史節要』,學習院大,1960)

  • 「高麗史節要の印刷と傳存」(中村榮孝,『靑丘學叢』11,1933)

  • 「高麗史節要の由來」(稻葉岩吉,『藝文』,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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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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