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석 ()

거창 곽종석 신도비 정측면
거창 곽종석 신도비 정측면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오적 처단을 상소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한 죄로 옥고를 치른 학자 · 독립운동가.
이칭
명원(鳴遠)
면우(俛宇)
이칭
곽석산(郭石山), 곽도(郭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6년(헌종 12)
사망 연도
1919년
본관
현풍(玄風: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구)
출생지
단성(丹城: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관련 사건
3·1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오적 처단을 상소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한 죄로 옥고를 치른 학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현풍(玄風). 아명은 곽석산(郭石山), 경술국치 후에는 곽도(郭鋾)라고도 하였다.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경상도 단성(丹城) 출신. 아버지는 곽원조(郭源兆)이다.

생애

4살 때부터 아버지와 이홍렬(李鴻烈)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을 배웠다. 12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유가 경전은 물론,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경전까지 섭렵하였다.

그 뒤 송학(주자학)에 관심을 가지며 회와(晦窩)라는 당호를 짓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여 20대 초반에 이미 학자의 명성을 떨쳤다. 25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 들어간 뒤로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이 더욱 심화되었다.

1883년 안동부 춘양(春陽: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으로 옮기며, 퇴계학문의 문적과 형세를 분석할 기회를 가졌다. 이 때 이항로(李恒老)의 주리설을 변론하면서 기호학계의 논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1895년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때마침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안동과 제천 지역의 의병 진영을 살피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거창의 다전(茶田)으로 옮겨 살았다.

옮긴 직후에 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의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당시의 유학자가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이어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과 비교할 때, 만국공법(국제법)에 호소하는 특수성을 보이고 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 전국에서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이 때 1899년 중추원 의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집(寒洲集)』을 편찬하였으며, 『남명집(南冥集)』도 교열하였다.

이는 학문 성향이 주리설의 종통인 퇴계학에 묶여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것은 기호학계의 논쟁이던 호락시비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0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고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다. 이 때 신기선(申箕善) 등 고관들의 수없는 서찰도 있어, 일단 상경하여 10여 일간 어전(御前) 독대(獨對)하며 구국의 의견만을 상주하였다.

주로 도덕성의 회복과 사회 기강의 확립으로 내수자강하여 대외적으로도 국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고종의 감복을 얻어 곧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고 삼세(三世) 추존까지 있었다.

그러나 거듭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로써 사양하였다. 그런데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오적 처단의 상소를 올리고 상경하였으나 배알의 기회는 얻지 못하였다.

1906년 전해에 일어난 을사의병이 확산될 때,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신기선이 유교학회 설립(후일의 大東學會)을 제의해 왔지마는 이것도 사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름을 ‘곽도’라 하고 자를 연길(淵吉)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도잠(陶潛)과 김이상(金履祥)의 성을 따서 이름을 만들고, 도잠의 자인 연명(淵明)과 김이상의 자인 길보(吉父)의 앞글자를 딴 것이었다.

그 뒤 영남은 물론, 호남의 전우(田愚)와 기정진(奇正鎭), 기호의 이항로·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문(儒門)과 또 양명학계의 황원(黃瑗)과 개성 출신 김택영(金澤榮) 등과도 교유하였으며,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까지 탐구하면서 심즉리설을 발전시켜갔다.

한편, 조식(曺植)과 이진상을 비롯한 경상우도 유림의 문적과 유적을 정리하여 이 지방 학풍의 위치를 확립해 놓았다. 그때 『한주집(寒洲集)』 간행을 계기로, 곽종석이 주장한 심즉리설이 주기설(主氣說)측에서는 물론, 안동을 중심한 주리설측으로부터도 이단시되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론적으로 설복함으로써 자신이 쌓은 학설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학자적 명성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따라서 3·1운동 때 137인의 파리장서에서 대표로 추대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2년형의 옥고를 겪던 중에 옥사 직전에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여독으로 곧 죽었다.

활동사항

이와 같이 곽종석은 먼저 한국유학사를 일단 결산한 학자로서 주목된다.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심즉리설을 확립시켰다. 그런데 그것이 왕양명(王陽明)의 주기설의 심즉리설과 다른 것은 물론, 같은 주리설이면서도 이황(李滉)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과도 같지 않았다.

그것은 퇴계학설의 수정 또는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한국 유학을 종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실은 조식의 학풍이 가득한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장 배경에서 조식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진상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황의 성리학이 아우러져 곽종석의 학문세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처음에 제자백자(諸子百家)와 불가의 경서까지 탐색한 뒤에, 주자학을 공부했으므로 성리학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조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적었다. 그러므로 기호학계나 호남학계와 폭넓게 교우할 수 있었고, 서양철학까지 탐문하는 폭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한 특징은 을미의병 때 당시의 유학자들이 서양을 오랑캐로 본 것과는 달리, 서양 각국에 공한을 발송한 데에서나 ‘파리장서’를 서두른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조선조의 당색(黨色)을 논함에 있어서도 어느 당색에도 속할 이유가 없다는 점까지 밝히면서 어떤 틀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곽종석의 학문은 21세 때의 「회와삼도(晦窩三圖)」와 25세 때의 「사단십정경위도(四端十情經緯圖)」가 기초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성(性)과 기(氣)를 합쳐서 말하는 것인데, 기라 함은 오행(五行)의 기이고 성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이(理)로서, 이와 기가 발함에 있어서는 이는 근본이고 기는 수단으로서 이가 기를 타는[乘]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이가 기를 바르게 타면 날[經]이 되는 것이니 그것이 사단(四端)이고,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 씨[緯]로서 십정(十情)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이를 주로 하고 십정은 기를 주로 하는 것인데, 모두가 이가 기를 타는 것은 같은 것이라 하여 주리설의 입장을 보여줬다.

그 뒤 32세 때 「이결(理訣)」을, 54세 때 「이기론(理氣論)」을 지으면서 주리설이 강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각종 주기설을 배격하였다. 또한 곽종석은 성리학에 머물지 않았다. 특히, 전국 유림과의 서한을 통해 남긴 예학이나 경학, 그리고 한문학의 업적도 컸을 뿐만 아니라, 지리·농업·산학(算學)·병법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양명학자와도 사귀었고, 또 서양의 국제법 책인 『공법회통(公法會通)』이나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의 후서(後書)를 쓰는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문자를 남기고 있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유학자의 태도는 망명(亡命)·기의(起義)·자정(自靖)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곽종석은 넓은 의미에서 자정론자였다. 을미의병 당시 안동에 살았는데, 그 때 권세연(權世淵)이나 김도화(金道和)의 의진에서 부장(副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을사의병 때는 최익현(崔益鉉)의 제의가 있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곽종석의 자정론은 즉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자중 고행하며 깨끗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글은 가르쳐도 문인록을 작성하지 못하게 했다(承敎錄은 후세에 작성한 것임).

그리고 국왕의 신하로서 국왕의 군대와 싸울 수 없다는 철저한 군주옹위론의 처지를 지켰으니, 이것은 의병을 일으킨 뒤 순창(淳昌)에서 국왕의 군대에 총을 쏠 수 없어 해병한 최익현과 같은 논리였다. 그리고 자정론의 성격에서는 전우와 논리적 궤를 같이하였으나, 위정척사의식에 묶여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1908년에 간도로 망명한 이승희(李承熙)와 그뒤 장석영(張錫英)이 망명을 제의해왔을 때, 그것도 거절하고 국내에서 죄인으로서 고행의 길을 고집했다. 3·1운동 때 파리장서는 74세 때의 일로 최후의 업적이었다.

‘파리장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로 서양을 가리켜 ‘대명지조(大明之照) 대화지행(大化之行)’이라 하고 있다. 조선 유학의 전통적 척사의식에서 본다면 서양 오랑캐를 대명 대화라 한 것이니, 결국 척사의식을 청산한 뜻이고 그 문서가 ‘파리장서’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 이래 고양된 위정척사사상을 청산하기 위한 작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위치를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술활동

『면우문집(俛宇文集)』이 있다. 본집이 63책 165권, 속집이 13권, 연보 4권, 승교록 1권, 도합 183권의 영인본이 나와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뒤 단성에 이동서당(尼東書堂),  거창에 다천서당(茶川書堂), 곡성(谷城)에 산앙재(山仰齋)가 곽종석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면우집(俛宇集)』
『예의문답류편(禮疑問答類編)』(정덕영)
『다전경의답문(茶田經義答問)』(박우희)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유학사략』(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6)
『유학근백년』(금장태·고광식, 박영사, 1984)
『한국사상사논고』(박종홍, 서문당, 1977)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삼일운동과 유교계」(허선도, 『삼일운동50주년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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