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철수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철수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부장, 제3차 조선공산당 초대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동재(銅再), 초봉(初峯), 창률(昌律), 창근(昌根)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3년(고종 30)
사망 연도
1986년
출생지
전라북도 부안
정의
일제강점기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부장, 제3차 조선공산당 초대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전라북도 부안 출신. 이명은 동재(銅再)·초봉(初峯)·창률(昌律)·창근(昌根).

생애 및 활동사항

동경에서 유학중이던 1915년 가을 반제(反帝)운동단체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는 등 청년 시절부터 반일적인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일제를 몰아낸 다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최팔용(崔八鏞)·이봉수(李鳳洙) 등과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또한 1921년 5월 8인의 사회혁명당 대표 및 이동휘(李東輝)·박진순(朴鎭淳) 등과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를 개최하였다. 고려공산대표회의에서 고려공산당의 출범을 선포하였고 김철수는 중앙위원 1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르쿠츠크파와 대립하는 상해파가 형성되었는데, 김철수는 양 파의 통일을 위해 1922년 11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 연합대회에 합동간부로 참가하고 12월 상해로 왔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대회에서의 파벌 대립에 실망하여 7월 귀국길에 들어섰다.

귀국 후 서울파의 김사국(金思國)과 ‘서상합작’을 하여 코르뷰로[高麗局] 국내부와 대립하였으며,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김철수는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 조직부장, 1926년 9월에 복구된 ‘제3차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한편, 동경 일월회(一月會)의 안광천(安光泉) 등과 서울 신파의 권태석(權泰錫) 등을 가입시켜 ‘통일조선공산당’을 건설하였다. 12월 6일 제2차 당대회 때 안광천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인계한 직후, 보고차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출두해 당의 경과 및 간부 개선 상황을 서면으로 보고하고 1927년 5월경 귀국하였다.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산 및 재건을 지시하였다.

이에 서울 상해파는 1929년 3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철수를 위원장에 선출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3월에 검거되었다. 1931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38년까지 복역하였다. 1940년 다시 붙잡혔고, 1945년 8월 17일 공주형무소에서 41명의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후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당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김철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세력의 연대를 주장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과 박헌영의 제휴에 노력하였다. 1946년에는 영등포 지역 노동자 300여 명의 입당 문제를 놓고 경성콩그룹 출신들과 대립하였다. 또한, 1946년 중반 들어 3당 합당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대회파’로서 당대회의 개최를 주장하며 반박헌영 계열의 선두에 서, 8월 8일 당으로부터 무기정권을 받았다.

이후 사회노동당에 대한 북조선 노동당의 비판이 거세지고, 11월 23일 남조선 노동당이 결성되면서 많은 사회노동당 사람들이 남로당에 입당하자, 사회노동당은 마침내 1947년 2월 해체되었다. 이 때 김철수는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 되어 모든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귀향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1-5(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김철수연구」(이균영, 『역사비평』봄호, 1989)
「김철수유고」(『역사비평 여름호』, 1989)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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