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평야 ()

나주평야
나주평야
자연지리
지명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강 중류에 형성된 평야.
목차
정의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강 중류에 형성된 평야.
개설

영산강 중류의 나주시 일대에 넓게 펼쳐진 충적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평야이다. 특히 황룡강(黃龍江)과 지석천(砥石川)이 영산강으로 유입하는 합류 지점 일대가 나주평야의 중심이다.

자연환경

영산강이 관류하는 나주지방은 담양에서 광주를 거쳐 남서 방향으로 뻗어내린 백악기 불국사통(佛國寺統)의 화강암대가 중앙부를 지난다. 영산강은 나주 부근에서 지석천과 소규모 지류들을 합하여 흐르며 나주평야는 이들 하천 연변의 충적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충적지 주변의 구릉지는 대개 해발고도가 50m 이하이다. 영산강 하류에서는 구릉지가 영산강변에 다가서 있어 충적지의 발달이 미약하다.

나주평야의 핵심을 이루는 충적지의 토양은 토성이 미사 식양질 내지 식질로 배수가 불량하다. 표층은 회색 내지 암회색을 띠고, 올리브색 또는 갈색 계통의 철반문(鐵斑紋)이 나타난다. 기층은 회색 또는 농암회색을 띠고, 반문(斑紋)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암반까지의 깊이는 5m 이상이다. 토양의 비옥도는 비교적 높고, 토양 반응은 약산성 내지 초약산성이지만 표토는 강산성 내지 약산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산강은 하상이 높은 감조하천(感潮河川)이기 때문에 나주평야는 거의 매년 범람과 침수의 피해를 입었다. 또한 영산강 유역에는 관개시설이 적어 가뭄의 피해도 극심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시작된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의 일환으로 하구에 둑을 축조하고, 중류와 상류에는 관개용 댐을 건설하여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줄이게 되었다.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 1단계 사업은 1972∼1979년간에 영산강 중류와 상류 지역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주요 실적은 장성댐·담양댐·광주댐·나주댐 등의 관개용 댐을 건설하는 한편 약 1,500㎞의 관개수로를 설치하고, 약 2,700ha의 야산과 완경사지에 논을 조성한 것이었다.

2단계 사업은 영산강 하류지역을 대상으로 하구둑을 건설하고, 간척지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 사업이었다. 영산강은 조석의 영향을 많이 받던 하천으로 하구를 중심으로 갯벌이 넓게 분포하였다. 1981년영산강 하구둑의 건설로 조성된 영산호는 동양 최대의 인공 담수호라고 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영산호에서 확보된 농업용수로 조성할 수 있게 된 간척지의 면적은 약 5,500ha에 이르렀다.

3단계 사업은 영암반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해수면을 대상으로 추진되었다. 이곳에서는 1996년영암반도와 해남의 산이반도 및 화원반도를 잇는 방조제가 완공되고, 넓은 갯벌이 육지로 바뀌었다.

현황

나주는 예로부터 삼백지방(三白地方)이라 하여 쌀·면화·누에고치의 생산이 유명하였고, 보리·고구마·마늘·양파·채소 등이 재배되었다. 나주의 벼농사는 백제시대에 시작되었고, 나주평야는 연간 5만 톤 이상의 쌀을 생산하는 전라남도 제일의 곡창지대이다. 그리고 영산강 연안의 구릉지에서는 배를 비롯하여 복숭아·포도·감·사과 등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또한 지석천과 극락강(極樂江) 연안은 원예농업의 중심지로서 오이·쑥갓·상추·고추 등의 주요 산지이다. 이들 농산물은 서울로 출하된다.

나주평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나주시는 1981년 나주와 영산포 두 읍이 합쳐져 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나주군과 통합하였다. 전주와 함께 호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나주는 전라남도의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1896년 13도제(道制)가 실시되고, 광주에 관찰부가 들어섬으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리던 지위를 광주에 내주고 쇠퇴하게 되었다.

침체 상태에 있던 나주는 1962년 충주에 이어 대규모 비료공장이 건설되면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공장은 1980년 폐쇄되었고, 그 자리에 각종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들어섰을 뿐 그 밖의 공업은 농산물·축산물·수산물을 가공하는 식품공업이 발달한 정도에 불과하다.

영산포는 역사적으로 영산강 유역과 해안지방의 세곡(稅穀)을 모아 경창(京倉)으로 보내던 영산창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1512년(중종 7)에 영산창에서 수납하던 세곡이 영광의 법성창으로 이관된 후에도 이곳에는 강창(江倉)이 존속하였다. 영산포는 1897년목포가 개항되면서 목포와의 사이에 수출입화물을 실어 나르는 선박의 내왕이 빈번해지면서 하항(河港)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호남선 철도가 개통된 후에는 수운과 육운을 연결하는 화물의 적환지(積換地) 내지 식민지 수탈의 창구로서 기능이 강화되어 1920년대 중반에는 나주와 비슷할 정도로 도시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로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뱃길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영산포는 쇠퇴하였고, 오늘날에는 일제강점기의 건물만이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지지』(국립지리원, 1980)
『한국지명요람』(국립지리원, 1982)
『신한국지리』(강석오, 대학교재출판사, 1984)
『한국지리-우리 국토의 자연과 인문-』(권혁재, 법문사, 2003)
『한국지리-각 지방의 자연과 생활- 』(권혁재, 법문사, 1995)
『신한국지리』(강석오, 대학교재출판사, 1984)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 198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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