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에 전하는 목멱산봉수(木覓山烽燧)로,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烽燧)라 하였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경보를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의 역할을 수행한 제일 중요한 봉수였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제1 · 제2 · 제3 · 제4 · 제5봉의 5개소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명철방(明哲坊:오장동 부근)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산마루에 있어, 양주 아차산(봉화산)봉수대와 연락되었다. 제2봉수대는 성명방(誠明坊:묵정동 부근)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산마루에 있어, 경기 광주의 천천(穿川:천림산)봉수대와 연락하게 하였다. 제3봉수대는 훈도방(薰陶坊:예장동 부근)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가 되는 산마루에 있어, 무악 동쪽 봉우리의 봉수대와 연락하게 하였다.
제4봉수대는 명례방(明禮坊 : 명동 부근)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가 되는 산마루에 있어,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수대와 연락하게 하였다. 제5봉수대는 회현방(會賢坊 : 회현동 부근)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가 되는 산마루에 있어, 양천 개화산봉수대와 연락을 주고 받게 하였다.
남산봉수대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관장하였으며 봉수군과 오원(五員)이라 칭하는 감고(監考)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봉수군은 군사 4명과 오장 2명을 배속시켰는데, 모두 봉수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선정 임용하였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 태조가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긴 때부터 갑오경장 다음해인 1895년 5월 9일(양력 7월 1일)까지 500여 년간 존속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남산 북쪽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봉수대가 파손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봉수 기능은 마비되었다.
갑오경장으로 봉화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1930년대까지 남산의 5개 봉수대 자리는 산 정상에 일렬식으로 남아 있었으나, 6 · 25전쟁 후로는 겨우 이곳이 봉수대 자리였던가 싶게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