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단결선언 ()

근대사
작품
1917년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 등이 독립운동의 활로와 이론의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의의 소집을 제의 · 제창한 문서.
정의
1917년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 등이 독립운동의 활로와 이론의 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의의 소집을 제의 · 제창한 문서.
구성 및 형식

이 문서는 B6판의 12면과 B5배판의 답지(答紙) 1면에 발기인의 서명이 있다. 발기인은 신규식을 필두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윤세복(尹世復)·조소앙(趙素昻)·신석우(申錫雨)·한진교(韓鎭敎) 등 14명이다.

내용

먼저 민족사적 전통에 근거한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을 이론화하여 1910년 융희황제(隆熙皇帝: 순종)의 주권 포기를 국민에 대한 주권 양여로 주장하면서, 국민주권설을 정립한 연후에 일본이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니,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주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해외동포가 민족대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언’의 공표는 당시 독립운동의 내외조건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안으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노령(露領)과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이 당국 정부의 강압으로 봉쇄당해 독립운동단체였던 권업회(勸業會)·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간민회(墾民會) 등이 해체되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령에서는 독립운동자들이 감금되거나 축출되어 독립운동이 시련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노령에 있던 이상설(李相卨)은 베이징[北京] 또는 상해로 피신하여 신규식·박은식 등 그곳 동제사(同濟社)의 인사와 함께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국제적인 대비책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즉,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망명을 추진한 것이다. 그에 따라 신한혁명당의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이 국내로 잠입하였지만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것이 1915년의 소위 보안법위반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독립운동자들은 어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였다. 그런 시기에 당시 독립운동의 지도적 구실을 담당하였던 이상설이 병석에 누워 1917년 3월에 죽었다. 그러므로 노령·만주·중국본토 등지의 독립운동계에는 개편이 요구되고 있었다.

밖으로는 때마침 그 해 3월 러시아 제일혁명(2월혁명)이 일어났다. 또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어 같은 처지에 있던 약소민족을 고무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도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연합국이 전세를 만회하면서 독일의 패전이 완연하였다.

1915년 미국이 불참한 속에 독일·중국과 일본이 대립하고 있어서 한국의 독립은 연합군보다 일본과 대립한 독일·중국과의 연합체제가 유리하다고 판단되어, 독일의 빌헬름(Wilhelm) 제정이나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정계획(帝政計劃)에 맞추어 광무황제를 옹립한 망명정부 수립을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계획은 실패하였고 1917년의 상황은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일본을 포함한 연합군이 결정적으로 우세해지면서 중국도 연합국에 기울어져갔다. 따라서, 독립운동도 필연적으로 전환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안팎의 요구에 응하여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지사인 신규식을 중심으로 조소앙·신석우·한진교 등의 소장인사가 국민주권설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지금까지의 망명정부 계획을 전환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멸론과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론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정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념을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정부적 통할체제(政府的統轄體制)를 계획하는 등 1917년까지 다양하던 독립운동의 이론을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이와 같은 ‘선언’의 계획은 당장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문서가 동포 사회에 널리 송달되었으며, 또 『신한민보(新韓民報)』 등 각처의 신문을 통해 계몽되면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조동걸, 『한국학논총』10, 국민대학교, 1987)
집필자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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