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응협 ()

민응협 글씨
민응협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성, 대사헌,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인보(寅甫)
명고(嗚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7년(선조 30)
사망 연도
1663년(현종 4)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주요 관직
대사성|대사헌|병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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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성, 대사헌,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鳴皐)·창주(滄洲). 민총(閔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주목사 민세주(閔世舟)이고, 아버지는 민영(閔韺)이며, 어머니는 심해(沈瀣)의 딸이다. 좌의정 민희(閔熙)·좌찬성 민점(閔點)·우의정 민암(閔黯)이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지평을 역임하고, 1635년 홍문록에 올랐다.

1638년 필선·사간·수찬·장령·교리를 거쳐, 1644년 광주목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아갔다. 다음 해 내직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내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왜신 접대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1646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부사로서 형률 집행에 매우 근엄하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때 왜관(倭館)의 담이 헐자 왜인들이 이를 이용, 왜관을 넓혀줄 것을 강청하였으나, 민응협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의 세를 꺾었다. 1649년 동래부사에서 안변부사로 전임하였으며,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53년(효종 4) 왕조실록을 춘추관과 사사고(四史庫)에 분장(分藏)할 때 어명으로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이를 보살폈다. 1655년 도승지가 되고, 다음 해 함경감사를 거쳐, 1657년(효종 8)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그 뒤 다시 대사성·대사헌·병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대사헌의 직을 사퇴하고, 그 해 죽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인물지(人物志)』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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