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

수덕사 벽화 중 공양화
수덕사 벽화 중 공양화
회화
개념
건물이나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
정의
건물이나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
개설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것은 후기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덤의 벽화는 이집트 고왕조시대(古王朝時代, 서기전 2000년대)에서 시작되어 에트루리아(Etruria)의 고분 벽화(서기전 7∼5세기경)를 거쳐 중세 기독교도들의 카타콤(Catacomb)으로 계속되고 있다.

궁전이나 신전(神殿)의 벽화로는 이집트의 고왕조시대 유적인 히에라콘폴리스벽화(Hierakonpolis 壁畫)와 크레타섬의 미노아왕조 궁전 벽화(서기전 1800년∼1400년경)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폼페이 유적의 건물 벽화들(1세기경)은 로마시대의 일반 벽화의 유행을 보여 주고 있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Ajanta 石窟)의 벽화(서기전 2세기∼서기 7세기경)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러한 벽화의 전통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석굴, 즉 바미얀(Bamiyan) · 호탄(Khotan) · 미란(Miran) · 키질(Kizil) · 투르판(Turfan) 등의 석굴 벽화로 전해져 인도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각기 개성 있는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래로 궁실, 고분의 벽화 장식이 보급되었다. 그러나 5세기 이후로는 불교 사원 · 석굴 등의 벽화 장식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인도 · 서역(西域)의 화법도 소개되었다.

중국의 벽화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돈황(敦煌)의 석굴 사원 내의 벽화이다. 남북조시대에서 원대에 걸쳐 풍부한 주제에 의한 많은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어 중국 미술의 보고(寶庫)를 이루고 있다.

기법

벽화의 기법은 그 역사가 오랜 만큼 납화법(蠟畫法) · 템페라(tempera) · 프레스코(fresco) 등 많은 종류가 응용되어 왔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는 안료를 빻아 용해된 백랍(白蠟)에 섞어 굳힌 고형 물감을 쇠 팔레트에 녹여 뜨거운 동안에 표면에 그리는 납화법이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유화(油畫)가 그려지기 이전에는 안료를 물에 탄 계란 노른자나 흰자위 등의 단백질 용액의 교질(膠質)에 섞어 그린 템페라 기법도 많이 사용되던 기법 중의 하나였다.

벽화는 표면이 다듬어진 돌벽 · 나무벽 따위에 직접 그리기도 하지만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것을 프레스코법, 다 마른 다음에 그리는 것을 섹코법(secco 法)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법랑(琺瑯) · 유화 · 액체 규산염을 사용하는 방법 등 다양한 기법이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가장 많이 사용되던 기법은 프레스코법이었다. 동양에서는 벽화들이 거의 섹코법에 의존하여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돌에 새기는 경우는 대상물을 실루엣(silhouette)으로 나타내는 법과 선으로 윤곽 · 세부 등을 나타내는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실루엣 그림에는 배경을 깎아서 도드라지게 하는 것과 배경을 남기고 대상물을 깎아 내는 두 종류가 있다.

물감

벽화에 사용되는 물감은 광물질(鑛物質)이 주로 사용된다. 식물의 즙이나 동물의 배설물이나 인조 물감 등도 쓰인다. 색채는 대개 백색 · 흑색 · 적색 · 황색 · 청색 · 녹색 등이 주류를 이루며 그 혼합색도 쓰인다.

백색은 석고와 백토(白土), 흑색은 탄소질인 흑(黑), 적색은 벤가라 · 석간주(石間硃) · 연지, 황색은 황토 · 갬부지 · 밀군청(密群靑), 청색은 암군청(巖群靑) · 라피즈라즐리 · 남(藍), 녹색은 녹토(綠土) · 규산동(珪酸銅) · 암녹청(巖綠靑) 등으로 색을 내었다.

양식변천

우리 나라의 벽화는 건물 벽화와 고분 벽화로 크게 나누어진다. 모두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건물 벽화에서는 사찰 벽화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고분 벽화는 고구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그 여맥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건물벽화

삼국시대

궁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잡지(雜志) 옥사조(屋舍條)에 나타난 진골(眞骨)의 주택에 대한 금지 사항 중에 건물의 오채(五彩) 장식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오채는 건물의 단청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벽화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금지 사항을 거꾸로 해석하면 진골보다 높은 성골(聖骨) 계급에서는 건물의 오채 장식이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것은 또 궁궐에서의 벽화 장식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삼국시대 사찰 벽화의 예로는 부여 서복사지(西腹寺址) 출토의 벽화 파편이 국립부여박물관에 5, 6개 보관되어 있다. 이 파편은 진흙 바탕에 회칠을 하였고 먹으로 그린 새의 일부가 남아 있다.

신라에서는 솔거(率居)가 그렸다는 황룡사노송도(皇龍寺老松圖)가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있어 삼국시대 사찰 벽화 내용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일본 나라(奈良)호류사금당벽화(法隆寺金堂壁畫)는 1949년에 불타버렸다. 하지만 그림 내용이나 화법, 벽의 흙 바탕과 물감 등이 알려져 있어 거꾸로 고구려에서의 사찰 벽화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즉, 이 벽화는 3층의 흙 바탕 위에 고운 흙과 아마(亞麻)의 혼합 막(膜)을 입혔다. 그리고 그 위에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각종 안료 외에 밀타승(密陀僧)이라고 불리는 산화연(酸化鉛 : 엷은 황색에서 붉은 황색)을 써서 약사불정토도(藥師佛淨土圖) · 아미타불정토도(阿彌陀佛淨土圖) · 석가불정토도(釋迦佛淨土圖) · 미륵불정토도(彌勒佛淨土圖) · 보살(菩薩) · 비천(飛天) 등을 그린 것이다.

필선은 중국 육조시대 회화식의 가는 선이며 채색은 음영법(陰影法)의 입체감을 내는 운채(暈彩)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불상들의 풍만한 육체 묘사와 함께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나라로 들어온 인도 화법의 영향이 분명하다. 이것은 고분 벽화의 전통과는 또 다른 국제적인 고구려의 양식이 존재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통일기의 건물 벽화에 대해서는 현존 예가 하나도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몇몇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즉, 경덕왕대에 솔거가 그렸다는 분황사(芬皇寺) 천수대비관음보살벽화(千手大悲觀音菩薩壁畫)와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 내원(內院) 남쪽 벽의 미륵보살도(彌勒菩薩圖), 금산사(金山寺) 금당 남쪽 벽의 미륵현신수계도(彌勒現身受戒圖), 흥륜사(興輪寺)의 보현보살도(普賢菩薩圖) 등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현재 벽화의 예가 남아 있다. 그리고 기록도 전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다소나마 알 수 있다. 우선 궁궐의 벽화에 대해서는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왕궁은 단벽(丹碧)으로 장식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단청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나 벽화 존재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사찰 벽화에 대해서는 ≪고려도경≫이나 ≪도화견문지 圖畫見聞志≫ 권 6 고려국조(高麗國條) 등에 의하면 초기 사원 벽화 중에 중국 상국사(相國寺)의 벽화를 이모(移模)하여 그린 개성 흥왕사(興王寺)의 벽화가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당시 흥왕사벽화의 모습은 전각을 온통 오천(五天)의 공(功)을 그려 장엄하였다는 ≪동문선≫ 권 12 흥왕사도량음찬시(興王寺道場音讚詩)에 있는 최석(崔奭)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말기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벽화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동문선≫ 권 65의 <선원사비로전단청기 禪源寺毘盧殿丹靑記>에 의하면, 1325년(충숙왕 12년) 동 · 서벽에 40신중상(四十神衆像)을 그렸다 한다.

그 뒤 전각을 더 넓히고 1327년 겨울에는 북쪽 벽에 55선지식상(五十五善知識像)을 그리고 창문 · 기둥 · 난간 등에 화려하게 단청을 입혔다고 한다. 이 벽화는 선원사 반두(班頭)인 노영(魯英)과 학선(鶴仙)이 그린 것으로, 노영은 <아미타구존도 阿彌陀九尊圖>(1307)를 남기고 있어 그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사찰 벽화의 실례로는 부석사(浮石寺) 조사당(祖師堂)의 벽화가 있다. 벽화는 범천(梵天) · 제석천(帝釋天) · 사천왕(四天王) 등 모두 6점이다. 이들 벽화는 국내 최고의 불교 벽화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들은 일부 탈락된 것을 제외하면 채색 등이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어 당시 사찰 벽화 양식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밖에 1937년에 실시된 수덕사(修德寺) 대웅전 보수 공사 때 1308년(충렬왕 34년)에 그려진 벽화들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주악비천(奏樂飛天) · 공양화(供養花) · 소불도(小佛圖) · 극락조(極樂鳥) · 나한(羅漢) 등으로 창방(昌枋)이나 고주(高柱) 주위의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황토칠로 마감한 벽에다 그려서 현재 탈락이 심하지만 형태나 필치는 대략 알 수 있다. 이 역시 당시의 벽화 양식을 살피는 데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사찰 벽화의 경우에는 예배용의 불화로 벽화보다는 탱화(幀畫 : 종이나 옷감 등에 그려 벽에 걸어 놓고 예배하는 불화)가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전각의 측면이나 창방 위의 포벽(包壁) 등에는 여전히 벽화가 그려졌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으로 조선 전기의 벽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후기에는 탱화의 성행으로 벽화는 창방 윗벽이나 측벽 또는 후불 뒷벽 등에 비천 · 공양화 등 주로 장식적인 역할에 그친 것 같다.

전기의 벽화로는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가 유일한 것으로 1476년(성종 7년)에 조성되었다. 아미타삼존후불벽화를 비롯하여 수월관음벽화(水月觀音壁畫) · 설법도 · 아미타내영도 등이 보존되어 있다.

후기의 벽화로는 위봉사(威鳳寺) 보광명전(普光明殿)의 벽화(관음보살도 · 비천도 · 동자도 등), 문수사(文殊寺) 극락전벽화(비천도, 불 · 보살도), 흥국사(興國寺) 대웅전벽화(수월관음도), 통도사(通度寺) 영산전(靈山殿) 견보탑품변상벽화(見寶塔品變相壁畫), 선운사(禪雲寺) 대웅전 삼신후불벽화(1840년) 등이 유명하다.

고분벽화

고구려 전기(4세기 중엽~5세기 중엽)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요동 진출 및 낙랑 멸망 뒤의 평양 진출에 의한 중국계 벽화 석실 고분(壁畫石室古墳)과의 접촉을 통하여 4세기 중엽경부터 시작되었다.

안악 지방(安岳地方)에 있는 동수묘(冬壽墓, 일명 안악3호분)는 귀화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동수의 무덤이다. 고구려 벽화 고분의 직접적 모형이 된 가장 확실한 예의 하나이다.

이 무덤은 좌우 측실(側室)이 달린 전실(前室)과 후실(後室)로 구성되는 고구려 쌍실묘(雙室墓)의 기본 구조, 말각조정(抹角藻井)의 천장 그리고 벽화의 기본 특색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동수묘의 벽화는 전실의 측실에 주인 내외의 좌상과 주방 · 마구간 · 위병(衛兵)이, 후실의 회랑벽에 긴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필선에는 태세(太細)가 있고 대상이 서로 겹쳐 공간의 깊이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 중국 화법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중국 양식의 벽화를 가진 무덤으로는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 408년) · 감신총(龕神塚) · 수산리고분(修山里古墳)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전기 고분이면서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 일명 수렵총)의 벽화에서는 그것이 단실묘(單室墓)인 까닭도 있지만 주인 부부 좌상은 현실 북벽에 크게 그려졌다.

엄격한 정면관(正面觀 : 옆에서 바라본 모습), 인물의 분리 병치(分離倂置, juxtaposition), 충분한 배경 공간, 태세가 없는 필선 등 구도와 화법에서 고구려의 개성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 양식은 쌍영총(雙楹塚)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서는 필선에 힘이 있고 인물들이 서로 머리를 돌려 시선을 교환하고 있어 동작감이 표현되는 진보를 보이고 있다.

전기 벽화의 특징적 무늬로는 중국 한대의 괴운문(怪雲文)에서 출발한 구름띠무늬가 있다. 이들 벽화는 프레스코법으로 그려졌으며, 물감으로는 녹청(綠靑) · 군청(群靑) · 황토 · 주토(朱土)와 먹이 쓰이고 있다.

고구려 중기(5세기 후반~6세기 전반)

통구 지방(通溝地方)의 고분에서는 인물화 · 생활화의 전통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연꽃 · 동심원(同心圓) 같은 무늬를 벽에 산개(散開)하는 새 형식도 생겼다.

평양 지방에서는 사신도(四神圖)가 벽면 전부를 차지하는 사신 벽화가 나타나서 차츰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물화 벽화에 있어서도 전기의 정좌한 좌상이 아니고 어떠한 생활 장면의 주인공으로 표현된 풍속도 벽화로 바뀐다.

무용총(舞踊塚) · 각저총(角抵塚)은 중기 풍속화 고분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늬 벽화 고분으로는 환문총(環文塚) · 귀갑총(龜甲塚) · 산연화총(散蓮花塚) · 강서대묘(江西大墓) · 강서중묘(江西中墓) · 노산리개마총(魯山里鎧馬塚) · 고산리1호분(高山里一號墳) 등이 있다.

무용총의 벽화는 화면의 정지감(靜止感), 색조의 안정감, 대상물의 병치 등 고구려 벽화의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수렵도는 그 구도가 기본적으로 중국 한대 수렵도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화면이 크게 정리되어 공간이 많고 힘이 있으면서 고구려 벽화 특유의 정지감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전기의 매산리사신총 벽화에 비하면 선이 살아 있고 인물의 경직이 풀려서 화법상의 발전이 뚜렷하다. 다만 나뭇잎은 밥주걱처럼 표현되어 있으며 후기의 사실적인 나무 그림과는 쉽게 구별되는 편년상의 한 기준이 된다.

사신도는 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주벽(主壁)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중기에 들어서이다. 가장 빠른 예가 개마총이고 강서중묘를 거쳐 강서대묘의 그림으로 발전한 것 같다.

강서중묘의 사신도는 사실(寫實)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작 형태의 기본 선이 만들어 내는 생동감과 색채에 의한 몰골법(沒骨法) 같은 표현이 그림에 정신적인 깊이를 주고 있다. 그 몽환적(夢幻的)인 성격이 무덤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묘에서는 전기에 유행하던 괴운문이 인동당초(忍冬唐草) 띠무늬로 바뀌고 있다. 그 힘에 넘치는 필치와 살아 있는 색감은 새로운 후기 양식으로의 이행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무와 산의 묘사도 6세기 중국 회화에서 보는 따위의 사실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기 벽화는 전기의 벽화에서 독립한 완전히 고구려화된 양식이다. 주제에 있어서는 인물화에서 사신도로 이행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화법에서는 중기 양식에서 후기 양식으로 이행이 진행된 시기였다. 인동당초띠무늬가 특징적인 무늬로 등장하였다.

고구려 후기(6세기 후반~7세기 전반)

후기에는 풍속도 · 무늬 그림은 완전히 사라지고 화려한 채색의 사신도 일색이 되었다. 벽면은 사신 이외에 비운문(飛雲文), 날개 달린 연꽃, 인동무늬들이 전체 공간을 메우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나무 · 산 · 바위 등이 사실적으로 되었다. 중국 육조시대 회화의 새로운 영향이 뚜렷하다.

필치에 힘이 생기고 그것이 화려한 빛깔과 함께 벽화 전체에 뛰는 듯한 율동감을 주고 있다. 연도(羨道) 벽에 신장(神將)이나 짐승을 그려서 수문(守門)의 임무를 맡게 하는 형식도 보인다. 즉, 영주 순흥리고분(順興里古墳) 벽화의 신장도의 유래를 보여 주고 있다.

인동당초띠무늬는 중기에 이어 계속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채색이 입체감의 효과를 내어 발전하고 있다. 통구사신총에서는 유래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짐승들이 기둥을 대신하여 방 네 귀에 선 채로 그려져 있다.

그것이 전기나 중기 양식과는 다른, 후기 양식을 더욱 특이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전형적인 후기 벽화 고분으로는 진파리1호분(眞坡里一號墳) · 통구사신총 · 내리1호분(內里一號墳) · 통구4호분 · 통구5호분 등이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관해 보면, 중국 미술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화법이나 구도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고구려계 양식을 확립하였다. 무용도 · 수렵도 등 벽화 주제의 배치나 내용 면에서 개성 있는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분을 현세 공간의 연장이면서 고인(故人)의 혼전(魂殿)임을 강조하여 묘주의 초상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 시설을 재현하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가호(加護)를 받기 위한 정토적(淨土的) 성격을 띠기 위하여 상징적인 무늬로 벽면을 채우기도 하였다. 연화무늬 · 사신도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는 처음에는 고분 벽화로 출발하여 그 임무와 기능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차츰 회화 자체가 가지는 순수 미술로서의 성격과 효과에도 관심을 가진 듯한 느낌이 든다.

통구사신총의 경우 그것은 고분 벽화라기보다는 궁전 벽화라고 해도 좋을 만한 현세적인 힘과 미(美)와 생명감에 넘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벽화는 발전과 변화가 있을 뿐 퇴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 벽화는 고졸(古拙)→숙달→절정기→퇴화→소멸이라는 미술 양식의 변천과정 중 고졸에서 절정기까지 뿐이고 거기에서 갑자기 끊기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는 아직 더 끌어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같이 급사(急死)한 미술 분야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고분 벽화와의 관계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 화가 가서일(加西溢)이 622년에 일본에서 벽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막(繡幕)의 원화(原畫)를 그렸다고 한다.

그 수막의 실물인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多羅繡帳)의 잔편이 주구사(中宮寺)에 현존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 화가 담징이 일본에서 활약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밖에도 많은 고구려 화가들이 일본에 가 있었던 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유적상으로는 고구려식과 백제식의 석실묘가 5세기 중엽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묘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구주 지방에는 벽화 고분도 축조되었다.

다만 이러한 일본 고분 벽화들은 고구려식의 풍속화나 사신도가 아니고 도안처럼 된 인물 · 말과 각종 무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내용이나 양식도 달라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 문화의 강한 토착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700년경에 그려진 나라(奈良)의 다카마쓰총(高松塚)의 벽화는 고구려계 고분 벽화로서 유명하다. 머리털까지 정밀하게 그려진 세화(細畫)이다. 하지만 서로 겹쳐진 인물의 구도, 밝은 색감 등은 순수 고구려 양식이 아니고 당나라 회화의 영향을 받은 국제화된 고구려 양식이라고 추정된다.

백제

백제 문화가 지니는 고구려적 색채는 수도가 남쪽으로 바뀔 때마다 줄어들었다. 그러나 고구려 계통의 석실묘가 남쪽으로 퍼진 것은 백제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벽화 전통도 역시 백제를 거쳐 가야로 전해지고 거기에서 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울이나 공주의 석실묘들은 벽면에 회칠 자국은 남아 있다. 그러나 벽화의 유무는 알 수 없다. 단지 공주 송산리고분이나 부여 능산리고분의 예로 보아 왕릉에는 반드시 벽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공주 송산리6호분의 벽화는 벽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백토로 사신도를 그린 것이다. 상태가 나빠 세부를 검토할 수는 없다.

능산리고분벽화는 물갈이 한 편마암 위에 그린 사신도의 묘사도가 있어 그 상태를 비교적 잘 알 수 있다. 백호도(白虎圖)의 경우, 구름무늬 배경에 호랑이의 머리와 몸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배경을 구름무늬로 메운 점은 천장의 구름무늬 속 연화 그림들과 함께 고구려 후기 고분 벽화의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선이 가늘면서 부드럽고 색채가 밝아 고구려 벽화와는 다른 밝은 명랑함이 백제적인 개성을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결국 2기뿐인 백제 고분 벽화는 모두 사신도 벽화이며, 능산리고분에서는 천장에 연꽃무늬가 구름무늬와 함께 산개되어 있다.

신라

고신라의 영토 안에서 발견된 벽화 고분은 영주 순흥면 태장리의 어숙묘(사적, 1974년 지정)와 영주 순흥 벽화 고분(사적, 1985년 지정) 등 2기에 이른다. 어숙묘는 직사각형의 석실묘로서 이 무덤의 천장에는 연화 그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현실의 석문(石門) 바깥 면에 신장도가 그려져 있어 연도에 신장도를 그리는 고구려 후기 벽화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현실의 그림은 탈락이 심해서 세부는 알 수 없다. 원래 사신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읍내리고분에는 수문장(守門將)을 비롯하여 인물도, 연화도 등 여러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역시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 강하게 스며져 있다.

경주에 고구려식 · 백제식 석실묘가 전래된 것은 6세기 후반이며, 이 무렵 이후의 왕릉으로는 발굴된 것이 없어 벽화의 유무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왕릉의 경우는 벽화로서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가야 지방에는 고령 고아동에 벽화 고분이 1기가 있을 뿐이다. 이 무덤은 평면이 ㄱ자형이면서 현실의 모습은 터널형이어서 공주시대의 백제 석실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무덤의 위치가 지산동(池山洞)의 큰 고분군과 떨어진 낮은 지대인 점으로 보아 무덤 자체의 형식과 함께 무덤의 피장자(被葬者)가 북에서 내려온 비가야인(非伽耶人)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재 벽화는 현실과 연도 각각의 천장에 연꽃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벽면의 회칠은 거의 탈락해 버렸지만 그림 자국이 남아 있다. 원래는 사신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연꽃들은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식이지만 꽃잎들이 짧고 넓어서 잎 끝이 그다지 뾰족하지 않다. 선명한 분홍색과 함께 고구려 연꽃과는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함안(咸安) 34호분은 직사각형 석실묘로, 벽면에 못이 박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림을 그린 막(幕)이 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발굴 조사된 것이 없다. 그러나 왕릉이 고구려식 · 백제식의 석실묘인 점에서 벽면에는 무엇인가 장식을 하였을 것이다. 사신이나 십이지상(十二支像)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주의 전신덕왕릉(傳神德王陵)은 도굴 구멍을 통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벽에 회칠을 하고 동 · 서벽은 각각 3구, 북벽은 6구로 병풍처럼 가른 다음, 그 12개의 직사각형 구획을 다시 상하 둘로 나누고 각각 주 · 황 · 청 · 백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벽화는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석물 장식으로 미루어 십이지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그 추측이 옳다면 고려 고분 벽화의 십이지상벽화는 통일신라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또 김천시 양천동의 석실묘에서도 암홍색의 채색 흔적이 있었다. 경주 구정리방형분(九政里方形墳)에서도 탈락한 석회 편을 분석해 본 결과 안료가 검출되었다. 원래는 채색 또는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고려 및 조선시대

고려시대 왕릉과 귀족들의 석실묘는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고분의 전통을 이어받아 십이지상을 주벽에 그렸다. 그러나 천장에는 연화가 아닌 성신도(星辰圖)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벽면에 직접 그리는 대신 천에 그려서 벽에 거는 방법도 있었던 것 같다. 고려 명종의 지릉(智陵)에는 벽에 못이 박혀 있었다.

개풍군 수락암동1호분(水落巖洞一號墳)의 벽화는 선화(線畫) 십이지상의 좋은 예이다. 문관 복장의 입상으로서 숙련된 필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형식에 흘러서 정신적인 면이 약화된 감이 있다.

장단군의 법당방고분(法堂坊古墳)의 벽화도 역시 선화 12지입상도 · 천장성신도이다. 공민왕의 현릉(玄陵)에도 십이지상의 벽화가 있다. 이 상들의 옷주름은 양식화되어 있으나 얼굴 모습에는 훨씬 인간미가 감돌고 있다.

특히 거창의 둔마리고분(屯馬里古墳)에서는 십이지상이 아니라 도교적(道敎的) 도상(圖像)들로서 피리를 불거나 복숭아를 들고 있는 선녀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필치나 솜씨는 미숙하지만 소박한 감정이 나타나 있어 오히려 신선한 개성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내부는 조사된 바 없다. 그러나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천장에는 일월성신도를, 네 벽에는 사신도를 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국장의궤 國葬儀軌≫의 그림을 보면, 선조 목릉(穆陵)의 것으로 형태가 완전히 바뀐 3족3두(三足三頭)의 주작(朱雀)과 어깨에서 불꽃이 날리는 백호(白虎)의 그림이 실려 있어 조선시대에도 고분 벽화의 전통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특별전도록』 2-고분벽화-(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73)
『한국미술전집』-벽화-(김원룡 편, 동화출판공사, 1974)
『한국벽화고분』(김원룡, 일지사, 1980)
『한국고미술의 이해』(김원룡,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집필자
김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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