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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西京)

고려시대사제도

 고려시대 평양에 설치되었던 유수경(留守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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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평양에 설치되었던 유수경(留守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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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서경은 고려시대의 지방제도와 권력구조, 그리고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는 즉위 초부터 서경 경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고도였던 평양이 황폐한 지 오래되고 여진족에게 노략질당하는 것을 걱정해, 918년(태조 1) 이곳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당제(堂弟)인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郎) 열평(列評)을 보내 지키게 하고, 참좌(參佐) 4, 5인을 두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처음에 평양은 군사적인 필요성에서 크게 주목된 듯하나, 얼마 뒤부터 국내정치상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킨 정책의 전환에서 엿볼 수 있다. 태조는 국내 호족(豪族)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언제 서경으로 승격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에 ‘서경’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는 것은 921년(태조 4) 10월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행정기구를 본격적으로 설치한 것은 922년이었다. 『고려사』 태조세가에 의하면 이 해 “서경에 거둥해 새로 관부(官府)와 원리(員吏)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사』 권77 백관지(百官志) 서경유수관 속관(屬官) 연혁조에, 서경의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관부로 낭관(廊官)을 설치하고, 시중(侍中) 1인, 시랑(侍郎) 2인, 낭중(郎中) 2인, 상사(上舍) 1인, 사(史) 10인의 원리를 두었으며, 그 아래 아관(衙官)·병부(兵府)·납화부(納貨府)·진각성(珍閣省)·내천부(內泉府) 등 서경의 행정실무를 분담하는 기관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설치된 922년의 서경행정기구는 고려 분사제도(分司制度)의 시초로서 주목될 만하다. 태조 때에 마련된 서경의 행정기구는 그 뒤 다소의 변경이 있었으나, 대체로 995년(성종 14)의 관제개편 때까지 존속되었다.
995년 서경유수관의 관제가 개편되어,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1인, 부유수(副留守) 1인, 판관(判官) 2인,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2인, 장서기(掌書記) 1인, 법조(法曹) 1인을 두었다.
이와 같은 서경 관제는 태조 때에 비해 외견상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나, 제도운영의 정신은 서로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 뒤 998년(목종 1)호경(鎬京)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062년(문종 16)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칭하고 경기사도(京畿四道)를 설치하였다.
1102년(숙종 7) 두었고, 1116년(예종 11) 분사제도를 한층 더 강화해 그 체제를 개경과 같게 하였다. 서경은 이러한 단계를 거쳐 발전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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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종 때 서경을 기반으로 한 묘청(妙淸)의 난 이후, 서경의 행정기구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1136년(인종 14) 유수·감군(監軍)·분사어사대(分司御史臺)는 모두 그대로 두되 다른 관반(官班)은 모두 없앴다.
이어 1138년 서경의 속관으로 의조(儀曹)·병조·호조·창조(倉曹)·보조(寶曹)·공조를 설치, 각각 영(令) 2인, 승(丞) 2인씩을 두었고, 팔관도감(八關都監)에 부사(副使) 1인, 판관 1인, 동남면서북면도감(東南面西北面圖監)과 제학원(諸學院)에 각각 판관 1인, 성용전(聖容殿)에 직원(直員) 1인을 두었다.
이와 같은 서경 관제가 확정되기까지에는 조신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고려사』의 “서경을 평정한 뒤부터 조론(朝論)이 일치하지 않았다.
혹자는 서경은 근본지지(根本之地)이며, 또한 태조가 설치한 것이니 구제(舊制)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고, 혹자는 서경은 반역의 땅이니 마땅히 일체를 고쳐 동경(東京)의 제도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까닭에 오래도록 처치하지 못하다가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 관(官)들을 두었다.”는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 기록내용으로 미루어 1138년의 서경 관제는 조정의 양론을 절충해 마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때의 개편으로 서경 관제는 태조 이래 지속되어온 독립된 정부형태의 행정기구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토관(土官)으로서의 관제의 단서를 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인종 때의 서경 관제의 성격은 그 이전의 분사제도와 그 이후에 나타나는 토관제로서의 과도적인 제도로 추측된다.
그 뒤 서경 관제의 대대적인 개편은 명종 때에 단행되었다. 이때의 개편으로 서경의 지위는 그 전에 비해 훨씬 더 격하되었다. 인종 때의 개편으로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는 것이 묘청의 난과 직접 관계되듯이, 명종 때의 개편은 서경을 거점으로 한 조위총(趙位寵)의 거병(擧兵)이 그 계기가 되었다.
명종 때의 개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서경의 행정기구를 중앙의 직접통제 아래 두게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경의 독립성은 상실되고 그 지위는 하락됨으로써 오랫동안 개경정부와 대등했던 서경의 행정기구는 토관직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고종 때 몽고족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더욱 쇠퇴해졌다. 1233년(고종 20) 서경 출신의 낭장(郎將) 필현보(畢賢甫)가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1252년(고종 39)까지 황폐한 채 방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 삼화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 및 그 소관의 여러 성을 몽고에 바치자,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관리를 둠으로써 몽고의 직접지배를 받았다.
그 뒤 1290년(충렬왕 16)에 돌려받아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삼았으나 옛날의 영광과 번영을 되찾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기는 유수관으로서의 행정적 지위마저 유지하기 어려워져서 1369년(공민왕 18) 만호부(萬戶府), 그 뒤 다시 평양부로 개편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하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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