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탄(崔坦)은 고려의 서북면(西北面) 출신이며, 그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최탄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영리(營吏)로서, 1269년(원종 10)에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원종이 동생인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국왕으로 세우자, 한신(韓愼), 이연령(李延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 등과 모의하여 임연을 벤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용강(龍岡), 함종(咸從), 삼화(三和) 등 여러 현(縣)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현령(縣令) 최원(崔元)을 죽이고, 가도(椵島)에 들어가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 감창사(監倉使) 박수혁(朴守奕)과 경별초(京別抄) 등을 살해하였다. 이들이 처단한 지방관과 경별초는 무신정권의 정국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자들이다. 이로 볼 때 이들의 저항은 무신정권의 정국 운영에 대한 조직적인 반발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강도(江都: 강화) 정부에서는 이군백(李君伯)을 북계안무사(北界按撫使), 현문혁(玄文革)을 역적방호장군(逆賊防護將軍)에 임명했으나, 최탄은 “임금이 없는 지금 선유사(宜諭使)를 누가 보낸 것이냐?”라고 하면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서경유수(西京留守) 최년(崔年), 판관(判官)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曺英紱) 등과 여러 성(城)의 원리(員吏)들을 죽였다.
이후 몽골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만나 서경(西京)을 비롯하여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황해도 6성을 들어 몽골에 귀부(歸附)할 것을 표명하였다. 또한 그는 일당인 이연령을 탈타아에게 보내, 고려의 경군(京軍)이 침노한다고 하며 군사 3,000명을 파견해 주기를 청하였다. 1270년(원종 11) 1월 망가도(忙哥都: 蒙哥都)는 안무사로서 몽골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에 주둔하여 최탄의 위세를 뒷받침해 주는 동시에 임연에게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원나라 세조는 최탄과 이연령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과 한신에게 은패(銀牌)를 각각 주고, 자비령을 경계로 이북 지역을 몽골에 내속시켜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면서 최탄을 동녕부총관(東寧府摠管)으로 삼았다.
1285년(충렬왕 11), 최탄, 한신, 현효철 등이 계문비 휘하의 사람들을 잡아서 무고하기를, “이 자들은 재상(宰相) 염승익(廉承益)과 함께 우리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몽골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요동선위사안찰부(遼東宣慰使按察府)에 알리니, 선위사는 안무총동경관(安撫摠東京管)을 파견하여 이들을 국문(鞠問)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에 고려 정부는 관리를 파견하여 몽골 사신과 함께 동녕부에서 이들을 대질했더니, 최탄 무리의 무고임이 드러났다. 이후의 최탄의 행적은 사료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동녕부는 무신정권의 몰락 및 삼별초항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원나라의 직할령(直轄領)이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후 동녕부는 1275년(충렬왕 1)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로 승격되었으나, 고려에서 자주 이를 돌려달라고 요청한 결과 1290년(충렬왕 16)에 고려에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