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9년(원종 10) 10월에 서북면병마사영 기관(記官) 최탄(崔坦)과 한신(韓愼)을 비롯하여 삼화현인 교위 이연령(李延齡)⋅정원도호 낭장 계문비(桂文庇) 등과 더불어 ‘ 무진정변(戊辰政變)’으로 집권한 임연(林衍)의 처단을 내세우며 저항을 일으켰다. 그런데 연주 사람이 임연 정권에 대한 저항에 가담한 것은 대몽전쟁기 지역 사회의 황폐화 및 몽골과의 긴장 관계에 따른 새로운 전쟁의 조짐에 맞선 지역 사회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저항을 일으킨 시기는 임연의 원종 폐립에 따른 몽골의 압력이 가중되어 전쟁 기운이 감돌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용강(龍岡) · 함종(咸從) · 삼화현(三和縣)의 사람들을 모아 함종현령 최원(崔元)을 죽이고, 밤에 가도(椵島)의 군영에 들어가 분사어사 심원준(沈元濬), 감창 박수혁(朴守奕)과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였다.
이들이 처단한 지방관과 경별초는 무신정권의 전국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던 자들이다. 이로 볼 때 이들의 저항은 무신정권의 정국 운영에 대한 조직적인 반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서경유수(西京留守) 및 용주(龍州) · 영주(寧州) · 철주(鐵州) · 선주(宣州) · 자주(慈州) 등 5개 주의 관리들을 살해하고 의주부사 김효거(金孝巨) 등 22명을 붙잡아 몽골로 투항하였다.
이들이 투항하자 몽골은 이들 지역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였다. 이런 공로로 현호철은 몽골 조정으로부터 은패(銀牌)를 받았고, 동녕부의 천호(千戶)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은 1285년(충렬왕 11)에 동녕부의 천호 한신⋅ 최탄과 함께 천호 계문비가 관할하는 사람들을 심문하여 재상 염승익(廉承益)을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