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鄭顗)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초명은 정준유(鄭俊儒)이다. 아버지는 별장(別將) 정효문(鄭孝聞)이며, 부인 적성백씨(赤城白氏)는 백이신(白利臣)의 딸이다.
정의가 1217년( 고종 4)에 대리(臺吏)로 서경(西京) 분사(分司)에서 일하고 있을 때 거란유종〔契丹遺種〕이 침입해 왔다. 고려 정부는 서경병마사 상장군 최유공(崔愈恭)과 판관 예부낭중 김성(金成) 등에게 서경 병력을 거느리고 5군을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최유공이 수탈을 즐겨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떠나 있었는데, 이 가운데 군졸 최광수(崔光秀)가 스스로 구고려흥복병마사 금오위섭상장군(句高麗興復兵馬使 金吾衛攝上將軍)이라고 칭하며 저항을 일으켰다.
정의는 본래 최광수와 같은 마을에 살아 서로 잘 알았는데, 교위 김억(金億)⋅백유(白濡)⋅ 필현보(畢玄甫) 등 10여 인을 거느리고 최광수의 처소에 가서 그를 살해하였다. 고종은 정의에게 단계를 뛰어넘어 섭중랑장(攝中郎將)으로 임명하여 내시(內侍)에 소속시키고 의관(衣冠)과 안마(鞍馬)를 내려 주었다. 이후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정의는 승진을 거듭하여 장군(將軍)과 시랑(侍郞)을 거쳐 종3품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몽골의 2차 침략이 끝난 후 1233년(고종 20) 필현보와 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대신들이 필현보를 귀순시키기 위해 그와 친밀한 정의를 선유사(宣諭使)로 서경에 파견하였다. 필현보는 정의를 그들의 지휘관으로 삼기 위해 회유하였으나, 정의는 끝내 굴복하지 않아 살해되었다.
정의는 청주정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고려사』 열전(列傳) 「충의(忠義)」에 등재된 만큼 이 가문의 위상을 높였던 인물이다. 그는 선대처럼 무반 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고종 때 최광수의 난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대장군의 지위까지 올랐고, 필현보와 홍복원의 반란에서 순절하여 열전 「충의」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