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수(崔光秀)의 본관은 성주(成州)이다. 최광수가 어떤 신분이었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북계(北界) 지역의 성주(成州) 출신이었고, 신분이 군졸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를 제거하기 위해 그와 같은 지역에서 친하게 지냈던 분대녹사(分臺錄事) 정준유(鄭俊儒) 등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서경 권역의 재지(在地) 세력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략 때, 최광수에 의한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최광수가 거란유종과의 전쟁에 나가지 않고 서경으로 되돌아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최유공(崔愈恭)과 같은 지방관의 사졸들에 대한 수탈이 일차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반기를 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지금까지 누적되었던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명종 대의 김보당 · 조위총 등과 같은 자들이 서경 권역을 근거지로 저항을 일으켰지만 곧 실패하였다. 그에 따라 무신정권은 대대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 서경의 공해전(公廨田)을 재편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재지 세력 내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몰락한 자들의 불만도 누적되었을 것이다. 특히, 최충헌 정권의 전횡, 지방관의 폐단, 거란유종의 침입에 따른 가혹한 역(役)의 동원 등은 지역 사회의 불만이 고조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최광수를 따랐던 군사들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서경을 큰 마찰 없이 장악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일정 규모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장차 큰일을 일으키려고 여러 신사(神祠)에 기도하였다.”라는 자료에서 서경 권역의 지역적 집단성을 이용하려는 측면도 엿보인다. 이는 곧 서경 권역의 현실성과 역사성이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고, 최광수 등이 고구려부흥운동을 표방할 수 있는 토대였을 것으로도 판단된다.
이런 점은 다분히 앞서 동경(東京) 권역의 신라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광수의 재지 세력으로서의 역량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그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부흥운동은 여타 재지 세력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한계가 있었으며, 재지 세력 내의 배타성으로 인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