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백(崔良伯)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씨 정권 집정자의 가노(家奴) 출신이다. 무신정권의 집정자 김준(金俊, 김인준)과 사돈 관계였다.
최양백은 최씨 정권의 권력 세습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1249년(고종 36)에 최씨 정권의 집정자 최이(崔怡)가 죽자 지이부사 상장군(知吏部事上將軍) 주숙(周肅)이 야별초(夜別抄)와 내외도방(內外都房)을 거느리고 정권을 왕에게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양백은 전전(殿前) 이공주(李公柱)와 김준 등 70여 명과 함께 최이의 서자 최항(崔沆)의 편에 서서 정권을 이어받게 하였다.
최항이 집권하자 최양백은 이공주⋅김준 등과 함께 별장(別將)이 되었고, 최항의 신임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최항이 죽기 직전에 아들인 최의(崔竩)의 권력 승계를 위해 고위직인 선인열(宣仁烈)⋅ 유능(柳能)과 함께 최양백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1257년(고종 44)에 최항이 죽자, 최양백은 이를 숨기고 야별초⋅ 신의군(神義軍)⋅ 서방(書房) 3번⋅ 도방(都房) 36번을 옹위한 뒤 최항의 죽음을 발표함으로써 최항의 아들 최의가 정권을 이어받게 하였다.
1258년에 신의군 도령낭장(神義軍都領郎將) 박희실(朴希實) 등이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 김인준, 장군 박송비(朴松庇), 도령낭장 임연(林衍)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이런 사실을 김준의 아들 김대재(金大材)가 알게 되었고, 김대재는 장인인 최양백에게 알렸다. 이에 최양백은 거사에 따르는 척하면서 이를 최의에게 고발하였다. 그러나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최양백은 김준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최의와 그 일당도 살해당해 4대 60여 년의 최씨 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