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주는 1258년(고종 45) 유경(柳璥)과 김준(金俊) 등이 최씨 정권 집정자인 최의(崔竩)를 제거할 때 지유(指諭)로서 참여하였다. 이 공로로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동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에 올랐고, 직위는 정4품의 장군(將軍)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장군 박희실(朴希實)과 산원(散員) 박천식(朴天植) 등과 함께 몽골에 사신으로 가서 대몽 강화의 걸림돌이었던 최의를 제거함과 함께 출륙환도(出陸還都) 및 고려 태자의 입조(入朝)를 알리기도 하였다. 이에 몽골 황제는 조문주와 박희실에게 금부(金符)를 하사하여 만호(萬戶)로 삼았다. 이후 그의 벼슬이 내시(內侍) 대장군(大將軍)⋅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출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문주는 무신 집정자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집정자가 된 임연(林衍)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69년(원종 10)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자, 장군 김문비(金文庇)⋅ 윤수(尹秀)와 함께 임연을 제거하려다가 김문비의 밀고로 임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문주는 『고려사』 반역 열전 ‘임연전(林衍傳)’에 등장하는 조오(趙璈)라는 인물과 활동하다가 죽은 시기나 역임한 관직 및 관련 사건 등이 비슷하여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는 견룡군(牽龍軍)의 행수(行首)와 내시 대장군 등 국왕과 친밀한 위치에 있었다. 조문주의 집안은 그의 관직과 더불어 자식 때에도 무반 관료로 진출하여 고위 관료까지 승진하면서 당대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258년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무신 집정자 최의 측근 세력을 제거한 공로로 1262년(원종 3) 위사보좌공신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