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주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정자 최의를 제거할 때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에 책봉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69년(원종 10)
본관
배천(白川)
주요 관직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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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문주는 고려 후기 1258년(고종 45) 유경과 김준 등이 최씨정권의 마지막 집정자 최의를 제거할 때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에 책봉된 무신이다. 이후 몽골에 사신으로 가서 만호(萬戶)의 벼슬까지 제수받았고, 내시 대장군과 동지추밀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269년(원종 10)에는 집정자 임연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정자 최의를 제거할 때 참여하여 위사보좌공신에 책봉된 무신.
가계 및 인적 사항

조문주(趙文柱)의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아들은 장군(將軍) 조윤번(趙允璠)이고, 사위는 비서랑(秘書郞) 장호(張顥)이다.

주요 활동

조문주는 1258년(고종 45)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최씨 정권 집정자인 최의(崔竩)를 제거할 때 지유(指諭)로서 참여하였다. 이 공로로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동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에 올랐고, 직위는 정4품의 장군(將軍)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장군 박희실(朴希實)산원(散員) 박천식(朴天植) 등과 함께 몽골에 사신으로 가서 대몽 강화의 걸림돌이었던 최의를 제거함과 함께 출륙환도(出陸還都) 및 고려 태자의 입조(入朝)를 알리기도 하였다. 이에 몽골 황제는 조문주와 박희실에게 금부(金符)를 하사하여 만호(萬戶)로 삼았다. 이후 그의 벼슬이 내시(內侍) 대장군(大將軍)⋅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출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문주는 무신 집정자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집정자가 된 임연(林衍)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69년(원종 10)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자, 장군 김문비(金文庇)윤수(尹秀)와 함께 임연을 제거하려다가 김문비의 밀고로 임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문주는 『고려사』 반역 열전 ‘임연전(林衍傳)’에 등장하는 조오(趙璈)라는 인물과 활동하다가 죽은 시기나 역임한 관직 및 관련 사건 등이 비슷하여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는 견룡군(牽龍軍)의 행수(行首)와 내시 대장군 등 국왕과 친밀한 위치에 있었다. 조문주의 집안은 그의 관직과 더불어 자식 때에도 무반 관료로 진출하여 고위 관료까지 승진하면서 당대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1258년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무신 집정자 최의 측근 세력을 제거한 공로로 1262년(원종 3) 위사보좌공신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상서도관첩(尙書都官貼)」(『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

논문

강재광, 「1258~1259년 장군 박희실·조문주의 대몽외교와 대몽강화」(『한국중세사연구』 34, 한국중세사학회, 2012)
최영호, 「13세기 중엽 조문주의 활동과 정치적 성향」(『한국중세사연구』16, 한국중세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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