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우(德雨), 호는 재곡(齋谷) 혹은 검남(劒南). 돈녕부도정 안황(安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안응형(安應亨)이며, 아버지는 정랑 안헌규(安獻䂓)이다. 어머니는 이유연(李幼淵)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54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고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1656년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 해에 대제학 채유후(蔡裕後)에게 뽑혀, 옥당(玉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657년 실록수정청(實錄修正廳)의 낭청(郎廳)이 되어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9년 부교리(副校理)에 오른 뒤 경기도의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곧 이어 효종의 상(喪) 때문에 돌아왔다. 1660년(현종 1) 교리(敎理)·수찬(修撰)을 지냈다.
1662년 장령(掌令)으로 있다가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였으나, 선왕대에 사가독서한 인물이므로 현종이 만류하였다. 이듬해 집의(執義)로 있다가 외직인 연안부사로 나갔다. 1664년 좌부승지·동부승지·병조참지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