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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별초(夜別抄)

고려시대사제도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를 구성하는 핵심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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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를 구성하는 핵심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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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야별초의 설치시기는 최씨정권의 2대 집정이었던 최우가 집권했던 1219년(고종 6)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시점은 대략 1220년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궁성과 향촌사회의 치안을 함께 수행했다. 이것은 중앙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치안유지의 공백 상태를 야별초가 대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도적이란 비단 남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만이 아니라, 최씨정권의 정적(政敵) 혹은 향촌사회의 저항세력들(민란 주동세력)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야별초는 관군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며 최씨정권의 권력 강화의 목적에서 조직되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민란이 증가하고 초적(草賊)의 숫자가 늘자 이를 제어하기 위해 야별초 병력을 늘려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분리했다는 것은 최씨정권의 군비 강화와 새로운 군사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또한 대몽전쟁기(1231∼1259)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자들로 조직된 신의군이 야별초에 더해져 삼별초(三別抄)를 이루었다.
야별초는 좌별초·우별초로 나뉘며 좌·우별초 각기 3번으로 나뉘어 각 번을 장군이 지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근래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마도3호선의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宅上)”목간 참조). 좌·우별초가 3번으로 나뉘어 있고 각 번을 장군 급이 지휘했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야별초 병력 수효가 많고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했음을 반증해준다.
최씨정권이 도방(都房)·마별초(馬別抄)·가병(家兵) 등 방대한 사병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삼별초를 따로 조직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병은 단지 최씨정권을 지탱하는 데는 유익했지만 그 이외의 공적 활동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고려의 정규군인 2군6위가 유명무실해져 국가적 차원에서도 비상시기를 대처할 수 있는 전투편제가 필요했다. 바로 그러한 비상 조직을 염두에 두고 창설한 군대가 야별초였고, 이후 확대된 것이 삼별초였다. 그러나 야별초가 중심이 된 삼별초는 1270년 본격적인 삼별초항쟁 이전에는 대몽전투나 국방보다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향촌사회를 지배하는데 더 많이 동원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야별초는 대몽항쟁기 고려 무신정권의 권력유지와 강도(江都) 정부의 본토 장악력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의 중심이었다. 더구나 야별초가 중심이 된 삼별초는 “권신이 집권하면서 이로써 조아(爪牙)를 삼아 녹봉을 후하게 하고 혹은 개인적 은혜를 베풀고, 또 죄인의 재산을 빼앗아 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권신들이 마음대로 부렸고, 그들은 앞 다투어 힘을 다했다. 김준이 최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임에 있어 모두 그 힘을 빌렸다”라고 했듯이, 최씨정권의 붕괴와 이후의 정권교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무력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삼별초를 이루었던 중심이 야별초였으며 군대로서의 성격과 함께 정치적인 성격도 강하게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중기의 별초군」(신안식,『건대사학』7,1989)

  • 「삼별초의 대몽항전과 지방 군현민」(김윤곤,『동양문화』20·21,1981)

  • 「삼별초와 그의 난에 대하여」(김상기,『동방문화교류사논고』,을유문화사,1948)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민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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