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의병을 일으켜 용골산성에서 후금군을 크게 물리치고 승리한 싸움이다.
1627년 정월 후금이 침입하면서 이들이 급히 남으로 진군하자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해 1월 말부터 2월에 걸쳐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해 후금군에 저항하였다. 이 때 의병장 정봉수가 이끄는 의병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정봉수는 영산현감을 지낸 전직관료로서, 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철산 용골산성에는 성이 험해 적을 피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인근 고을 백성들이 이곳으로 모여 들어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때를 기다리던 정봉수가 쾌히 응하고 의병 모집에 박차를 가하자 며칠 안 되어 수천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그는 주1 김종민(金宗敏)을 중군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 등과 함께 성을 지켜 피난온 백성들을 구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고립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본성을 지킨다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고 평안감사에게 피난민들을 산군(山郡)으로 철수시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정봉수는 이를 듣지 않았다.
성을 함께 지키기로 한 장사준이 배신해 후금 진영과 내통하면서 정봉수도 함께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정봉수는 성안에 들어가 장사준을 베고 성안의 남은 병사를 모아 함께 죽을 결심을 하고 적의 완강한 공격을 물리쳤다.
정봉수는 조선과 후금 사이에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음에도 계속 성에 머물면서 항전하였다. 이에 후금군은 의주 · 창성 · 곽산의 병력을 총집결해 이 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많은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이어 후금군 부장(副將) 유해(劉海 : 일명 興朝)가 거듭 출성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응하자, 재차 공격을 감행했으나 또 많은 사상자만 내고 의주로 퇴각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의 저항이라 하여 후금에게 맹약의 위배라는 구실을 주기는 했으나 조선에도 힘과 용기 있는 인물이 있음을 보여준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