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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元宗)

고려시대사인물

 고려후기 제24대(재위:1259∼1274)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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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제24대(재위:1259∼1274)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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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259∼1274. 이름은 왕식(王植), 초명은 왕전(王倎), 자는 일신(日新). 고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 柳氏)이다. 비(妃)는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인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충렬왕이 즉위해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追尊)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었다. 1259년 강화(講和)를 청하기 위해 몽고에 갔다가 그 해 고종이 사망하자 이듬해 귀국해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1260년 왕자 왕심(王諶)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1261년 태자를 몽고에 보내 아리패가(阿里孛哥)의 평정을 축하하였다. 원종 역시 태자 때 몽고에 다녀왔고 태자를 몽고에 보내는 등 몽고에 성의를 표명해 원활하게 국교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해 강도(江都)에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하였다.
1262년(원종 3) 10월에 미륵사(彌勒寺)의 공신당(功臣堂)에 13명의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벽상도형(壁上圖形) 되었다. 이 중 천도공신(遷都功臣)이었던 최이(崔怡)주 01)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당시 김준이 대몽항쟁을 주도한 최이의 이념을 따르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1263년 홍저(洪泞)·곽왕부(郭王府) 등을 일본에 보내 해적이 고려를 침범하는 것을 일본 정부가 단속해달라고 청하였다. 1264년(원종 5) 8월에 몽고가 사신을 보내 친조(親朝)를 요구하자 몽고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원종의 친조에 대해 김준 일파는 굴욕이라 주장하면서 반대하였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장용(李藏用)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결과는 친조라는 사소한 명분을 가지고 대몽관계를 악화시켜 전쟁을 재발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김준 등의 세력이 일방적으로 대몽 강경노선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1267년 감수국사(監修國史) 이장용, 동수국사(同修國史) 유경(柳璥), 수찬관(修撰官) 김구(金坵)와 허공(許珙) 등에게 명을 내려 신종·희종·강종 3대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1268년 환도(還都)를 준비하기 위해 개경에 출배도감(出排都監)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12월 임연(林衍)이 김준(金俊)을 살해한 무진정변(戊辰政變)이 일어났는데, 국왕 원종이 이 정변을 배후에서 주도하였다.
1269년에는 태자 왕심을 몽고에 보냈으며, 친몽정책(親蒙政策)과 개경환도를 추진하다가 반몽정책을 펴던 임연에게 폐위당해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원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복위되었고, 복위된 지 15일만에 친위적·근왕적인 성격의 무신들에 의해 임연을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국왕폐위사건의 진상 해명을 추궁하는 몽고의 입조 요구에 따라 곧바로 몽고에 갔는데, 원의 세조(世祖)에게 태자 왕심의 혼인을 청하였고 아울러 몽고 군대를 청병하였다. 이는 몽고 황실과의 혼인으로 막강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몽고 군사를 빌어 임연을 제거하고 실제적 왕정복고를 이룩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의도와는 상반되게, 서북면병마사영 기관(記官)이었던 최탄(崔坦) 등이 임연을 타도한다며 서경 권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북계를 장악하였다. 이후 자비령 이북 북계 지방에 몽고 직할지인 동녕부(東寧府)가 두어짐으로써 강도 정부와 대립하였다.
한편 권세가에 의해 일반 농민들의 토지가 점탈당하고 양인이 노비화되는 현상이 만연하자 노비·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1269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때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은 반역자나 죄인의 토지·노비를 적몰하는 정도로 그쳤으므로 그 효과는 미미했다.
1270년 몽고와 재항전할 준비를 갖추던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라 실권을 행사하였다. 그 해 태자와 더불어 몽고에서 돌아와 임유무의 정치적 기반이 불안한 상태를 기회로 삼아 개경환도를 실현하였다. 이때 임유무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몽고와 최후까지 항전하려 하였으나 원종에게 회유된 홍문계(洪文系)·송송례(宋松禮) 등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임유무 제거와 개경환도 이후 강화도에서는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三別抄)가 항전을 선포하였으나 3년 만인 1273년에 여·원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274년 원나라의 매빙사(媒聘使)가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민간의 독녀(獨女)와 역적의 처, 종의 딸 등을 보내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시호는 순효(順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능(陵)은 소릉(韶陵)인데,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내동리에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원사(元史)

  • 대몽항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8)

  • 「원종·충렬왕대 전민변정사업의 성격」(신은제,『한국중세사연구』21,2006)

  • 「고려 원종 11년(1270) 삼별초항쟁의 배경」(신안식,『명지사론』13,2002)

  • 「원종대의 권력구조와 정국의 변화」(강성원,『역사와 현실』17,1995)

  • 「고려 원종대 민의 동향에 대한 일고찰」(신안식,『건대사학』8,1993)

  • 「임연정권에 관한 연구」(성봉현,『호서사학』16,1988)

  • 「高麗元宗朝の廢立事件と蒙古の高麗西北面占領」(池內宏,『白鳥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16,1988)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崔瑀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민병하
개정 (2009년)
전경숙(숙명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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