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년(헌덕왕 3) 정월에 시중 양종(亮宗)이 병으로 사직하자 원흥이 이찬(伊飡)의 관등으로서 집사성(執事省)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1년 만인 이듬해 봄에 물러나고 후임으로 균정(均貞)이 시중이 되었다.
당시는 신라 하대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시중의 수명이 고작 1∼2년에 불과하던 불안한 시대로서, 원흥도 짧게 1년간 시중의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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