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서로군정서, 신한청년당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독립노동당 초대 당수 등을 역임한 어문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단주(旦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8년(고종 35)
사망 연도
1961년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
내용 요약

유림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위원, 독립노농당 초대 당수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어문학자, 아나키스트이다. 1898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경술국치 당시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의 4자 혈서를 써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21년 이후 북경과 상해에서 신채호,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2년 아나키스트로 전향하였다. 김두봉, 신채호 등과 함께 『한글말본』, 『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하였다. 해방 후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농당을 결성해 당수에 취임하고 『노농신문』을 발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서로군정서, 신한청년당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독립노동당 초대 당수 등을 역임한 어문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화영(華永)이며 아호는 단주(旦洲). 경상북도 안동 출생. 아버지는 유이흠(柳李欽)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부흥회, 자강회, 서로군정서, 비밀결사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한중항일연합군 등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 대한국민의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세계 아나키즘 역사상 최초의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농당의 초대 당수를 지냈다.

생애 및 활동사항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1906년에 고성 이씨(固城李氏)와 혼인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4자 혈서를 써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고, 그 뒤 안동에서 부흥회(復興會), 대구에서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장에서 앞장섰으며, 그 뒤 무력항쟁의 실력을 준비할 목적으로 만주로 탈출하여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군정서(軍政署)에 참여하였다.

1921년 북경(北京)으로 가서 신채호(申采浩)·김창숙(金昌淑)·김정묵(金正默)·남형우(南亨雨) 등과 함께 순 한문지 『천고(天鼓)』를 발간하여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중국에 선양하였다. 상해(上海)로 가서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의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다가 1922년 대만 청두대학(成都大學) 사범부 문과에 입학한 뒤 아나키스트로 전향하였다. 1925년 이 대학을 졸업한 뒤 광둥(廣東)·상해·우한(武漢)을 내왕하면서 중국 국민당내 좌파를 이루는 아나키스트원로들과 사귀었고, 천두슈(陳獨秀)·진형명(陳炯明) 등 사회주의 세력과도 접촉을 하면서 광둥의거(廣東義擧)·우창폭동(武昌暴動)에도 참가하였다. 한편, 김두봉(金枓奉)·신채호 등과 『한글말본』·『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하였다.

다시 만주로 되돌아가서 북만주일대의 민족세력을 규합하여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한족총연맹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군의 통합, 강화에 힘썼다. 1928년 평양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서기부 주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일본군의 만주 강점에 따라 일본경찰에 잡혀 본국으로 압송, 징역 5년의 언도를 받고 복역을 끝낸 뒤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동북으로부터 충칭(重慶)으로 가서 ‘일개민족·일개정부·일개이념·일개집단’의 구호 밑에 임시정부 중심의 단결을 호소하였으며, 이듬해에 임시의정원 경상북도 대의원이 되고,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8·15 광복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여 1946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결성하여 당수에 취임하는 한편, 『노농신문』을 발간하여 자유·평등이라는 평생의 이념선양에 힘썼다. 1947년 전국혁명자총연맹을 창립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9년 194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아나키스트대회(1948년 10월1일)’에 한반도 대표로 초대되었지만, 정부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기능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다. 1952년 7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일어난 ‘발췌개헌안’에 항의해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발기했다.

상훈과 추모

1961년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거행된 사회장 당시, 장례위원장인 김창숙은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君在大韓重)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君去大韓空)”라고 추도하였다. 서울특별시 북한산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김성국, 이학사, 2007)
『단주 유림 자료집』1(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독립문화사, 1983)
『독립운동사』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유림선생약전』(단주선생사회장위원회, 1962)
「단주 유림의 아나키즘과 독립운동」(김영천, 『동양정치사상사』7/1, 2008)
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인물자료(www.history.go.kr)
집필자
송남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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