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 출신. 유양수(柳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준(柳公濬)이다.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鄰)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부(崔溥)의 딸이다. 처부(妻父)는 송준(宋駿)이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 · 최산두(崔山斗)의 문인이다.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한 뒤 수찬 ·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 · 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 · 응교 · 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 · 집의 · 사인 · 전한 · 대사성 · 부제학 ·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 · 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유희춘에게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을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나 학문, 정치하는 도리에 대한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최부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 · 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 · 『속몽구(續蒙求)』 · 『역대요록(歷代要錄)』 · 『속휘변(續諱辨)』 · 『천해록(川海錄)』 · 『헌근록(獻芹錄)』 ·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 『시서석의(詩書釋義)』 · 『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