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기기 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고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更點)의 기(器)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공로로 정5품의 행사직(行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천(李蕆)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의 두 기본 관측기계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 완성된 천문관측의기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 등이 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金鑌)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欽敬閣)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또,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