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처음 이름은 흥필(興弼), 자는 창백(昌伯), 후에 자를 백경(伯敬)으로 고쳤다. 호는 노우(魯宇). 아버지는 정욱(鄭煜), 어머니는 영양이씨(永陽李氏) 이수춘(李秀春)의 딸이다.
1747년(영조 23)에 두역(痘疫)이 창궐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주(慶州)에서 영양(英陽) 입암(立巖)으로 옮겼다. 이후 대구 칠계에 가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문하에서 두와 최흥벽(崔興壁)과 동문수학하였다. 또한 백불암과 절친한 친구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 도서(圖書), 상수(象數), 율려(律呂), 산법(算法), 지리(地理) 등을 두루 섭렵, 깊이 연구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전초(篆草)에도 뛰어나 원근에 널리 알려졌다.
1782년(정조 5)에 경주(慶州)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정구(鄭逑)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중간(重刊)할 때, 이 책이 직접 정구의 수교(手校)를 거치지 못해 와오(訛誤)가 더러 있음을 밝힌 장현광(張顯光)의 발문(跋文)을 꼭 부간(附刊)해야 한다고 발의하였다. 결국 이 발문(跋文)으로 인해 옥산서원(玉山書院)과 회연서원(檜淵書院) 간에 논쟁이 일기 시작해 마침내 도내(道內) 모든 식자들이 정충필의 의견에 찬성하게 되었다.
정충필은 특히 역상(曆象)에 밝아 ‘일행도수(日行度數)’와 ‘월행도수(月行度數)’를 계산해 일월(日月)이 상회(相會)하는 수(數)를 구해 19년에 일곱 번 윤달을 두는 ‘치윤법(置潤法)’을 계산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역도(易圖)에 있어서 이제껏 후천도(後天圖)에 중괘원도(重卦圓圖)가 없던 것을 새로이 계발(啓發)해 마침내 이를 완성하였다. 저서로는 『노우문집(魯宇文集)』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