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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통의부 제1중대장, 상해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백광운(白狂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24년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통의부 제1중대장, 상해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백광운(白狂雲).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䄵)을 따라 일본군과 싸웠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만주로 망명해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뒤 동창생 신용관(申容寬) 등과 함께 합니하(哈泥河) 산골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의용군을 편성해 국내외로 횡행하면서 일제의 행정기관 파괴, 일본경찰 및 앞잡이들의 숙청 등 여러 방면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5월 강계(江界)에 출동해 문옥면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해 7월 이창덕(李昌德)을 시켜 후창(厚昌)에 출동해 친일파 악질군수 계응규(桂膺奎)를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21년 관전현(寬甸縣) 일대에서 침입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계속하여 관전·통화·임강(臨江)·유하(柳河) 등 각 현(縣)에 출동해 일제의 앞잡이 기관인 일민단(日民團)·보민회(保民會)·강립단(强立團) 등을 습격, 소탕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조직하고, 제1중대장에 취임해 군대를 모집하고 강계(江界)의 어뢰주재소를 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22년 해 8월 남만주 각지에 분산되었던 각 단체가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해 제1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덕원(全德元) 등 일부가 이탈해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는 등 내분이 일어나자, 김원상(金元常)·박응백(朴應伯) 등과 함께 탈퇴하고 통의부에 반감을 지닌 부대를 규합하여 항일 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뒤 압록강 철교 준공식 때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에 참여하였으며 참의장(參議長)을 역임하였다. 대한통의부의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에 의해 살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4(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자료집』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집필자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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