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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韓脩)

고려시대사인물

 고려후기 밀직제학, 동지밀직, 판후덕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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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밀직제학, 동지밀직, 판후덕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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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중찬(中贊) 한악(韓渥)의 손자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1347년(충목왕 3)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政房)의 필도치(必闍赤)주 01)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해 따라갔다. 1353년(공민왕 2) 전의주부(典儀注簿)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치가 되었고 이어 전리좌랑·성균사예·비서소감·병부시랑·국자감좨주 등을 역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를 거쳐 좌대언(左代言)으로 승진하였다. 1365년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왕에게 신돈이 바른 사람이 아니라며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밀려난 다음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왕이 다시 불러 이부상서·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발탁했으며, 곧 승선(承宣)에 임명됨으로써 전선(銓選)주 02)을 관장하게 되었다. 우왕대에 밀직제학·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고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한수의 필적이다.
이색(李穡)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고, 또한 『유항집(柳巷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동문선』에「영모정행(永慕亭行)」등 시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책에서도 한수의 시문이 산견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서기 일을 맡은 관원
주02
인사행정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윤용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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