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희 ()

삼운성휘 / 홍계희
삼운성휘 / 홍계희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순보(純甫)
담와(澹窩)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03년(숙종 29)
사망 연도
1771년(영조 47)
본관
남양(南陽)
주요 관직
경기도관찰사|이조·예조의 판서
정의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澹窩).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진(洪受晋)이고, 아버지는 참판 홍우전(洪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정언이 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교리로 특진하였다. 이어 수찬을 거쳐, 1742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어 함경도의 진휼정책을 살폈다.

이듬해 다시 북도별견어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 그 지방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 복명해 영조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1743년 부사과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 혐의를 탄핵했다가, 당색으로 공격했다는 의심을 받아 삭탈당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다시 승지로 특채되었다.

1747~1748년 일본 막부의 9대 장군 도쿠가와[德川家重]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상사(通信上使)로 뽑혀, 부사 남태기(南泰耆), 서장관 조명채(曺命采) 등 일행 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형조참판이 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청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하였다. 1749년 충청도관찰사 때 시무의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이 때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해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 시행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상 문제가 많다는 중신들의 비난을 받고 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전출되었다. 1754년 이조판서로 재기용된 이후, 형조·병조·호조의 판서 및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76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잘못을 고변케 함으로써 세자가 죽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뒤 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는 유학자로 자처했으나 그보다는 시무에 밝고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많은 관심을 보인 개혁 실천주의자였다. 이는 그가 젊어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유형원(柳馨遠)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 여겨진다. 그의 개혁관은 1749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며 올린 시폐개혁안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개혁안에는 과거제를 철폐하고 명나라의 관리 임용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과제조(科制條)」, 한천소시(翰薦召試)의 철폐와 대간제도의 개선책을 제시한 「관제조(官制條)」, 5군영을 철폐하고 훈련도감과 어영청만을 두되, 정병(正兵)의 수를 늘리자는 「군제조(軍制條)」, 양역(良役)의 모순을 시정하려 한 「균역조(均役條)」 등 네 가지 안건이 담겨 있다.

이 중 세 가지는 조신(朝臣)들에 의해 모두 거절되고, 군역조만이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양역의 폐단이 양반이 역을 맡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생 구제와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에게 군포(軍布)를 내게 해 양역에 충당하자는 유포론(遊布論)을 제기했다.

이 개혁안은 사림의 맹렬한 비난으로 취소되고, 대신 경제력을 나타내는 전결(田結)에 부과되는 결포론(結布論)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이 결포제조차도 대부분 지주 관료층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토지 1결에 2두(斗)의 결미(結米) 내지 결전(結錢)의 형태로 균역법에 부분 반영되었다.

그는 노론 이재의 문인을 자처했으나, 대다수 이재 문인들로부터는 배척당한 인물이었다. 한때는 조현명·송인명·김재로 등 탕평파에 접근해 출세했으나, 후일 조현명 등과 불화하면서 멀어졌다.

그 대신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형조판서 윤급(尹汲), 참판 이기경(李基敬) 등과 결탁하였다. 그리고 영조 계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와 내통하는 등 권력을 좇아 처세한 탓에 사림들로부터 소인 내지 간신으로 지목되었다.

시호가 문간(文簡)이었으나, 두 손자가 정조시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두 아들(洪趾海·洪述海)과 일가가 처형당하게 되자,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이재의 뇌암서재(雷巖書齋)에 배향하자는 충청도 유생의 논의가 있었으나, 이재 문인의 반대로 유산되었다.

글씨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삼운성휘(三韻聲彙)』가 있다. 그리고 편저로는 『균역사실(均役事實)』·『준천사실(濬川事實)』·『균역사목변통사의(均役事目變通事宜)』·『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해동악장(海東樂章)』·『명사강목(明史綱目)』·『경세지장(經世指掌)』·『문산선생상전(文山先生詳傳)』·『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사곡록(寺谷錄)』·『창상록(滄桑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정만조, 『동덕여대논총』10, 1977)
「균역법의 선무군관」(정만조, 『한국사연구』18, 1977)
집필자
정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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