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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고대사개념용어

     우리 나라 역사에서 시대 구분의 한 시기.   즉,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태봉·마진)-고려의 세 나라가 정립했던 시대를 말하는데, 이 시기의 사회 변동은 한국사상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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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시대 초기 강역
    분야
    고대사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우리 나라 역사에서 시대 구분의 한 시기.즉,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태봉·마진)-고려의 세 나라가 정립했던 시대를 말하는데, 이 시기의 사회 변동은 한국사상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적 의미를 지닌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사실상 이 시기는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데, 926년까지 북쪽에 발해가 존속해 있어 이른바 남북국시대로 불렸으므로, 926년 이전까지 포함해 후삼국시대로 보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문제점이 있다.
    신라는 말기에 이르러 통치력이 약화되고, 각 지역에 호족 세력이 할거하는 가운데 과다한 조세의 부과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면서 군웅이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견훤(甄萱)·궁예(弓裔)·양길(梁吉) 등을 들 수 있는데,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각각 후백제,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리하여 신라는 다시 분열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그 뒤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이 등장하면서 후삼국의 판도는 고려가 중심이 되어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게 된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서면서 귀족사회의 분열이 심화되고 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일련의 정치 개혁들이 모두 실패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안으로는 중앙 귀족의 왕위 쟁탈전이 격심하게 전개되어 768년(혜공왕 4)부터 887년(진성여왕 1)까지 100여 년 동안 무려 20여 차례의 정치적 변란이 일어났다.
    밖으로는 불평 귀족과 군진 세력가(軍鎭勢力家)의 반란이 속출하는 등 지배 계급의 분열 대립이 격화되어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남으로써 통치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특히 흥덕왕 대의 정치 개혁이 실패한 이후에 전개된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지방에서는 중앙 정권에서 떨어져 나온 귀족이나 지방의 세력가들이 불교 사원, 해외 무역, 군진 세력, 촌주의 지위 같은 것을 배경으로 호족으로 성장해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고 지방 분권적인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신라 사회를 지탱해 오던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이 축소되어 진골 귀족들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진골 귀족들의 대토지 경영이 확대되어 자영 소농민층이 몰락해 가는 가운데 흉년으로 기근까지 들게 되어 백성이 떠돌아 다니게 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민심이 동요되었다.
    이에 지방의 여러 주군(州郡)에서는 조세를 거두지 못해 국가 재정이 궁핍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신라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더 이상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신라의 통치력이 붕괴되고 지방 분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면서 각지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원래 지방민들은 훨씬 전부터 과중한 조세의 부담과 가혹한 역역(力役)의 징발 때문에 유망(流亡)의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하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퇴폐적인 향락 생활로 더욱 심화된 수취 체제의 모순뿐만 아니라 국가 체제의 해이에서 비롯된 부담의 가중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압박에 시달리던 지방민들은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 다니거나 세력 있는 귀족들의 장원(莊園)에서 보호를 받으며 그들의 사병이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도적이 되어 질서를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889년 진성여왕의 조세 독촉을 계기로 마침내 폭발해 전국적인 내란의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지배층에서의 통치력 붕괴와 하층에서의 각종 조세의 과중은 신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었으며, 각종 반란으로 후삼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내란은 진성여왕 대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각지의 많은 반란 세력들 중에서 뚜렷한 것은 사벌주(沙伐州)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의 기훤(箕萱), 북원(北原)의 양길, 완산주(完山州)의 견훤, 철원(鐵圓)의 궁예 등으로 이들은 모두 지방민의 불만을 기반으로 해 일어난 것이다.
    이 때는 신라의 골품제 같은 사회를 규제하는 모든 제한이 쇠퇴하고 오직 실력으로 약육 강식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으므로 무수한 군웅이 들고 일어나 할거하게 되었다. 수많은 반란 세력 중에서 정권을 수립해 신라와 대항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바로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옛 백제의 유민을 바탕으로 백제를 부흥시킨다는 구호를 내걸고 후백제를 건국했고, 궁예는 옛 고구려의 유민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부흥시킨다는 구호를 내걸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 이후 견훤은 전제 군주로서 행세하면서 신라를 적대시하고 궁예와 왕건의 대립자로서 존재하였다.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서울을 철원으로 옮기더니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지위를 높이기 위해 미륵불을 자처하며 전제주의를 강화해 나갔다.
    견훤은 사벌주 출신으로 서남 지방 방수군(防戍軍)의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큰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 지방의 주현(州縣)을 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호응을 보내 군사가 5,000명에 이르렀으며, 892년에는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어 서남 지방 각지의 호응을 얻어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는 마침내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정식으로 백제 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설치해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후백제의 판도는 한때 경상도 서부까지 세력을 뻗쳤는데 대체로 충청남도의 중부에서는 태봉과 대치하고, 남쪽으로 전라남도의 서남부에서는 왕건의 수군과 다투었으며, 동쪽으로는 상주·합천·진주를 잇는 지역을 전선으로 해 한때는 안동·영천·경주 등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신라 왕실 또는 몰락한 진골 귀족 출신으로 여겨지는 궁예는 처음에 세달사(世達寺)의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했는데, 세상이 소란해지자 891년에 죽주의 반란군 두목 기훤에게 투신하였다. 그러나 기훤이 거만해 함부로 대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원의 반란군 두목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동쪽 10여 군을 공략해 모두 점령한 뒤에 명주(溟州)에 들어가 그 곳 지방 세력의 후원으로 병력을 늘리고 장군으로 추대되어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고는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여러 군현을 점령하고 철원에 도읍하니 그의 위세가 사방에 떨쳐 황해도를 비롯한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귀순해 왔다.
    세력이 커진 궁예는 895년에 내외 관직을 설치해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다음 해에는 송악군(松嶽郡)의 대호족인 왕건 부자(父子)가 귀순했는데, 이 때의 판도는 강원·경기·황해 등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과거 궁예의 주인이었던 양길을 격파하고 901년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며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구려(즉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그 뒤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했으며, 이듬 해에는 다시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서울을 철원으로 옮겼다.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고 914년(신덕왕 3)에는 연호를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 후 궁예는 휘하의 장군 왕건 등을 보내 각지를 공략하게 해 강원·경기·충청북도의 전부와 평안남도의 일부, 충청남도의 북부, 경상북도의 서북부, 그리고 전라남도의 서남부를 점령해 당시 후삼국 판도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최대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태봉을 건국한 궁예는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작은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명명하는 등 전제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918년(경명왕 2) 궁예는 그에 반대하던 부하들에게 축출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고려라고 정함으로써 후삼국은 신라·고려·후백제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 삼국의 패권 다툼은 사실상 고려와 후백제 간의 싸움이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다툼은 신라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도 일대에 대한 작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즉, 경상도 일원의 지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이 패권 다툼의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라는 유명 무실한 존재였고, 경상도 일원의 신라 외곽 지대는 중앙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누가 먼저 복속시키느냐에 문제 해결의 핵심이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패권 다툼에서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왕건은 이와 달리 유화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으로부터 여러 번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의 친신라 외교 정책은 신라 왕실을 비롯해 각지의 세력자가 고려로 기울어지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또한 왕건은 견훤의 무력주의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무력으로 대결하기도 했으며 작전 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먼저 해군을 보내 서남 해안 지방을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배후를 교란, 견제하고, 일본과의 내왕을 차단했으며, 서해안으로는 강력한 해군을 내왕시켜 후백제가 오월(吳越)·후당(後唐) 등 중국과 교류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후백제를 포위, 고립시켰다.
    내부적으로는 소백산맥을 이용한 남진 정책을 취하였다. 즉, 왕건은 상주에서부터 성주·합천을 거쳐 진주에 이르는 전략선을 확보함으로써 후백제 포위를 완성하고, 신라 일대를 고려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다.
    반대로 견훤은 동진 정책을 취하였다. 즉 상주에서부터 안동 쪽으로 연결되는 전략선을 마련함으로써 고려의 후백제 포위 정책을 타파하고, 경상도 일대를 후백제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두 정책이 충돌하는 경상도 서북부의 상주를 비롯해 안동·합천·진주 등지에서 자주 큰 전투가 벌어졌으며, 최후의 승리는 고려가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 간의 패권 다툼은 신라를 두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930년 후백제군이 안동에서 크게 격파되면서 주도권은 고려에게 넘어갔다. 이어 934년 고려는 후백제를 정면으로 공격해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을 점령함으로써 대세를 결정 지었다.
    이 때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아들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이 아버지 견훤을 유폐하고 정권을 탈취하였다. 이에 견훤은 3개월 뒤 탈출해 고려에 항복하고, 신라의 경순왕도 935년에 고려에 항복해 천 년 사직을 끝맺게 되었다.
    드디어 936년 고려 태조는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해 신검 등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리하여 후삼국시대의 혼란은 끝이 나고 새로운 통일된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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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 (1995년)
    박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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