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헌종 1)에 임진왜란 때의 공신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과 노산(魯山) 정호의(鄭好義) 형제의 우국충정을 길이 새기고자 향중 유림의 공의로 서원을 창건하였다.
1835년에 소산사(蘇山祠)를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9년 동래정씨 문중에 의해 복원되면서 소노서원(小魯書院)으로 개칭하였다. 1985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강당을 확장하여 정규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호인은 본관이 동래(東萊)이다. 조선 전기 예조참의를 지낸 정절(鄭節)의 8세손이며 의능참봉(義陵參奉) 정희란(鄭希鸞)의 큰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양산향교 교임이었던 정호인은 공자의 위패를 교동으로 옮겨 지켰으며,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왔다. 임진왜란 선무 3등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1603년(선조 33)에 후릉 참봉의 벼슬이 내려졌다.
정호의는 자가 시원(時仲)이며 정호인의 동생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호인, 안근(安瑾), 이몽란(李夢鸞), 최기(崔沂)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선조 25) 6월 5일 경주성에서 싸웠으며 6월 9일 경주부윤(慶州府尹) 및 판관(判官)들과 「문천회맹록(蚊川會盟錄)」을 작성하였다. 1597년(선조 30) 7월 21일 곽재우의 의병군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지역교육에 힘썼다.
소노서원은 상의사(尙義祠)·정교당(政敎堂)·연경당(硏經堂)·강례실(講禮室)·서대(西黛)·동루(東樓)·삼문(三門)을 갖추고 있다. 동래정씨 문중서원으로 향사일은 음력 9월 중정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