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전(曷懶甸)은 고려 전기에 동여진(東女眞)의 거주 지역으로 개략적인 지역 범위는 정주(定州) 이북, 두만강 이남 지역으로 비정된다.
고려는 갈라전 지역의 여진 촌락을 기미주(羈縻州)로 편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완안부(完顏部)를 중심으로 여진의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면서 고려와 완안부의 여진 사이에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1104년(숙종 9)에 완안부 기병이 고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지나가는 정주(定州) 지역에까지 이르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고려는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천리장성 이북의 기미주 지역을 모두 상실하였다. 고려는 여진의 기병에 대비하고자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에 고려는 윤관(尹瓘)을 중심으로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동북 갈라전 지역으로 출진하였고 요충지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109년(예종 4) 7월에 고려가 철수할 때까지 갈라전 지역에서 고려와 여진 사이의 공방전은 지속되었다.
갈라전의 남쪽 경계 지역은 고려의 천리장성이 지나가는 정주 지역이 명확하다. 그런데 북쪽 경계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존재한다. 『금사(金史)』에는 완안부 여진이 퉁먼[統門]의 병사를 이끌고 갈라전 지역으로 이동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퉁먼은 두만강 일대의 지명으로 추정된다.
갈라전의 개략적인 지역 범위는 정주 이북, 두만강 이남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금사』에는 고려가 9성을 갈라전 지역에 축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9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함흥평야설, 길주설, 두만강 이북설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 에 9성 가운데 길주(吉州)가 오랑캐의 변경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고 기록된 점,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 에 고려가 새로 개척한 지역이 장주(長州), 정주에서 사방 300리 지역이었다고 기록된 점,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세주에 9성 지역이 7일정(七日程) 거리였다고 기록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길주설이 유력하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갈라전은 오늘날 북한의 함경남도, 함경북도, 양강도를 아우르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