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년(목종 4)에 축성되었다. 이후 1041년(정종 7) 9월에 최충(崔冲)이 다시 성(城)과 보(堡)를 쌓았다. 평로성(平虜城)의 규모는 582칸이었다. 평로진 주변에는 감시 초소 역할을 하는 보자(堡子), 즉 수(戍)가 6개소 설치되었다.
도융수(檮戎戍)는 36칸, 진흉수(鎭兇戍)는 30칸, 직잠수(直岑戍)는 41칸, 항마수(降魔戍)는 50칸, 절충수(折衝戍)는 30칸, 정융수(靜戎戍)는 30칸이었다. 그리고 관성(關城), 즉 고려장성 1만 4495칸이 축조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뒤 시기에 평로진은 유원진(柔遠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편, 1001년(목종 4)의 간지는 신축(辛丑)이고 1041년(정종 7)의 간지는 신사(辛巳)이다. 신사년 간지를 신축년으로 오독한 것으로 해석하여 『 고려사』 와 『 고려사절요』에서 1001년에 평로진을 축성하였다는 기록을 부정하는 일부 견해도 있다.
평로진에는 중랑장(中郞將) 1인, 낭장(郞將) 3인, 별장(別將) 7인, 교위(校尉) 15인, 대정(隊正) 21인, 행군(行軍) 847인, 정용(精勇) 13대, 좌군(左軍) 10대, 우군(右軍) 3대, 보창(保昌) 4대, 신기(神騎) 28인, 보반(步班) 42인, 백정(白丁) 42대의 주진군이 편성되었다.
평로진은 고려의 장성이 지나가는 주요 거점으로 관(關)이 설치되었다. 평로진은 고려 변경의 최일선 지역으로 여진인들의 내조(來朝) 경로나 외적의 침입 경로에 있었다.
평로진 주변의 일부 여진인들은 고려의 축성에 도움을 주었다.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고지지(高之知) 등은 평로성과 영원성(寧遠城) 개척에 도움을 주어 1042년(정종 8)에 예물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고려는 변경 지역의 여진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1073년(문종 27)에는 평로진 근방 여진 촌락의 호구(戶口)를 고려 호적에 편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