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현의 서쪽 1리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15세기 어느 시점에 건립되었다고 판단된다. 강서향교 건립은 조선 건국 후 1읍 1교 원칙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향교 건립은 지방 인재 양성 및 교화를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강서향교는 조선 전기 강서현의 관아 서쪽 1리에 위치했으나, 어느 시점에 다른 장소로 이건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천보(李天輔)가 작성한 「강서향교이건비기(江西鄕校移建碑記)」에 따르면, 현재 향교 위치가 '산세가 험하고 물이 들이치니 그 터가 맞지 않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숙종 대 현령 조정신(趙正伸)으로부터 이건 논의가 발의되고, 이숭신(李崇臣) 등이 거듭 발의한 끝에, 1739년 현령 김치일(金致一)이 부임한 뒤 1740년 2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5월에 마무리지었다.
이천보의 기문에 따르면, 이건된 향교는 "건물이 숭엄하고, 문과 누각이 크고 시원해, 그 규모와 위치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향교가 갖춰야 할 건물들의 대부분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건국 후 향교에 전답과 노비 등을 지급하고 교관을 파견해 교생들을 가르쳤고, 봄과 가을에는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도록 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 이념으로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했고, 그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강서향교는 북한에 소재하고 있어, 1950년대 이후의 상황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