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채색지도가 첨부된 필사본. 내용 구성은 강역(疆域)·연혁·풍속·토산·방리(坊里)·산천·단사(壇祠)·주필성적(駐蹕聖蹟)·고적·공서(公署)·학교·원우(院宇)·사찰·관적(官蹟)·효열(孝烈)·과환(科宦)·사마(司馬)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 읍지는 여러 항목에서 특징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조세에 관련된 항목을 별도로 설정하지 않고 방리조에 각 면[坊]의 결세(結稅)·호세(戶稅)·인구, 소속 동리명 및 위치를 기록하여 놓았다.
주필성적조에는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평양-영유(永柔)-강서-해주를 경유하면서 강서현에서 머물렀던 3개월간의 주필 상황을 기록한 성적비문(聖蹟碑文)과 1829년(순조 29)에 비를 건립한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적조에는 현재 강서 우현리고분으로 불리는 삼묘(三墓)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품자형(品字形)으로 분포되어 있는 삼묘는 속설에 고구려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관에서 매년 청명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사실과 축문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학교조에는 향교의 구조와 건물규모·제물·임원 등을 기록하였다. 이어서 향교 건물이 퇴락하여 거처할 수 없었던 것을 1899년 봄에 군수 윤성보(尹性普)가 자신의 봉름(俸廩:조선 시대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을 헐어 새롭게 보수하여 소학교를 창설하고 교원과 접생(接生)을 둔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윤성보가 쓴 <소학교서 小學校序>와 도훈장(都訓長) 김최건(金最鍵)이 쓴 <게판 揭板>, 1740년(영조 16) 향교 이전에 관한 <이건사적비문 移建事蹟碑文> 등이 실려 있다. 조선에서의 근대식 소학교는 1883년의 원산학당에서부터 찾을 수 있으나 강서군에서도 비교적 일찍 소학교가 창설되었음과 창설 취지를 읍지를 통해 살필 수 있다.
관적조에는 1388년부터 1897년까지의 선정비·명정비(明政碑)·인정비(仁政碑)·청정비(淸政碑)·거사비(去思碑)·마애비(磨崖碑)를 남긴 수령들의 도임·체거 일자와 행적이 간략하게 수록되어 치정의 역사를 보여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이 밖에 강서읍지로 1829년 현령 이현호(李玄好)가 편찬한 ≪강서현지 江西縣誌≫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이를 고종 때에 수정, 작성한 ≪강서읍지≫와 민족항일기에 필사한 ≪강서현지≫가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