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부여 · 옥저 · 예 등의 언어와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부여어군이라 부를 수 있다. 부여어군의 언어들은 모두 사멸되었지만, 그 가운데 고구려어는 약간의 자료를 남겼을 뿐 아니라, 중세국어의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그 흔적이 국어 속에 남아 있다.
중세국어는 고려 초엽에 형성되었는데, 그 토대가 된 개경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많건 적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중세국어의 ‘나믈(那勿=鉛)’과 ‘ᄐᆞᆫ(呑=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과 ≪조선관역어 朝鮮館譯語≫에 각각 보이는데, 고구려어에서 온 것으로 믿어진다. 고구려어에 ‘乃勿(鉛)‘과 ‘呑(谷)‘이 있었던 것이다. 언어사연구에서 일부 학자들이 제기한 저층설(底層說)을 원용하면, 중세국어의 고구려어 저층을 말할 수 있다.
부여어군에 속하였던 언어들이 모두 사멸의 길을 밟은 것은 동아시아의 고대언어사에서 가장 큰 사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 고구려어에 관한 자료가 단편적으로나마 전하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어의 자료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적(史籍)에 기록된 인명 · 지명 · 관명 등이다. 그들 자료를 이용하는 데 있어 특히 주의할 점이 있는데, 고유명사는 그 음상(音相)만 기록되어 있을 경우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어자료로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음상과 의미를 갖춘 것들만이 고구려어의 확실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다행히 고구려어에서는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한자의 음을 빌리기도 하고 새김을 빌리기도 하여, 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에 대하여 이 두 표기를 남겨놓기도 하였다.
그런 경우 하나는 고구려어 단어의 음상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의미를 알려준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예에서 그와 같은 두 가지 표기를 보여주는 ≪삼국사기≫ 지리지는 고구려어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권37의 고구려지명표기는 주된 자료가 되며, 권35의 본 고구려 지명표기도 보조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권37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泉井郡一云於乙買”에서 ‘泉井’은 새김을 이용한 표기이고, ‘於乙買’는 음을 이용한 표기라고 보면, 고구려어의 ‘어을(於乙)’과 ‘매(買)’가 각각 샘[泉]과 우물[井]을 의미한 단어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어을’ · ‘매’로 적은 것은 편의상 우리나라의 현대한자음을 적은 것이지, 결코 고구려어의 정확한 음상을 보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어 단어의 정확한 재구(再構)는 고구려시대의 한자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뒤에라야 가능하게 될 것이다.
지명표기에서 가정된 단어가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될 때, 그 존재는 더욱 큰 확실성을 띠게 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iri kasumi(伊梨柯須彌)’라 표기되어 있다.
연개소문의 성은 ‘泉’자로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일본서기≫의 표기는 그의 성이 실제로 ‘iri’로 발음되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iri(淵, 泉)’는 위에서 본 ‘어을(於乙=泉)’과 같은 단어임이 분명하다.
현존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고구려어에 관한 지식은 어휘에 국한되어 있는데, 모두 합해야 100단어에 미치지 못한다. 그 가운데서 ‘어을(於乙=泉)’ · ‘매(買=井, 水, 川)’와 같이 둘 이상의 예에 나타나는 단어의 경우는 비교적 큰 확실성이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수는 많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홀(忽=城)’ · ‘달(達=山, 高)’ · ‘노(奴) · 내(內) · 뇌(惱=土, 壤)’ · ‘탄(呑) · 단(旦) · 돈(頓=谷)’ · ‘파의(波衣) · 파혜(波兮) · 바의(巴衣=巖,峴)’ · ‘구차(口次) · 홀차(忽次=口)’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하나의 예에만 나타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확실성이 보장되는듯이 보인다. “三峴縣一云密波兮”에서 ‘峴’과 ‘波兮’의 대응은 확실하므로, 나머지 부분인 ‘三’과 ‘密’의 그것도 가정될 수 있다.
여기서 ‘밀(密)’이 삼(三)에 해당되는 고구려어 수사였음이 가정된다. 현존자료에서 고구려어 수사로는 ‘우차(于次=五)’ · ‘난은(難隱=七)’ · ‘덕(德=十)’ 등이 더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 예에서만 나타난다.
“七重縣一云難隱別”의 경우를 보면 ‘七重’과 ‘難隱別’을 어떻게 대응시켜야 할지 확실하지 않다. 이 경우 ‘七’과 ‘難隱’, ‘重’과 ‘別’을 대응시키는 것은 몇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퉁구스어의 ‘nadan(=七)’, 고대일본어의 ‘nana(七)’를 고려할 때, 고구려어에 ‘난은(難隱=七)’이 있었다고 가정해볼 수 있으며, 한편 중세국어의 ‘ᄇᆞᆯ(重)’, 고대일본어의 ‘fa"(重)’를 고려할 때 고구려어에 ‘별(別=重)’을 가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어가 부여어군에 속한다고 할 때, 부여어군은 남쪽의 한어군(韓語群)과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본래 한 조어(祖語)에서 갈려나온 것으로 믿어진다. 이 조어를 부여 · 한공통어(扶餘韓共通語)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국어의 최고단계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든 고구려어의 단어들은 신라어나 백제어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그런 차이는 조어로부터 갈려나온 뒤에 서로 다르게 변화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한편, 고구려어는 퉁구스어 및 일본어와 가까운 면이 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부여어군은 한어군보다 알타이 제어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부여어군이 일본어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느끼게 하지만, 그 영향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더 깊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