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원 출신.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달냐워스토크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군 장교로 종군하였다. 1917년 12월 러시아에 있는 한족 단체들이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로 통합되자 이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2월~3월초까지 니콜리스크 우스리스크에서 개최된 노·중령 독립운동단체대표회(이칭: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서 종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여 대한국민의회로 발족하면서 해외 한민족의 대표 최고기구를 표방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윤해(尹海)와 함께 선발되어 그 해 9월 파리에 도착했으나 평화회의는 이미 폐회된 뒤였다. 그리하여 고창일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자유 한국」 등을 프랑스어로 발표하고 돌아왔다.
1920년 5월 상해(上海)로 갔다가 다시 러시아로 들어갔다. 6월경 문창범(文昌範)을 중심으로 중국 북경에서 온 박용만(朴容萬)·유동열(柳東說) 등과 이르쿠츠크 등지에서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유동열·김하석(金夏錫)·최고려(崔高麗)·안병찬(安秉瓚) 등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이른바 이르쿠츠크파공산당)을 조직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과 개조론 논쟁이 일어나자 창조파에 참여하였다. 1933년 8월 조선공산당 길림성화룡현위원회(吉林省和龍縣委員會)의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함흥·원산 등지에서 동지를 모아 하얼빈에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을 역임하였고, 1948년 초대 외무부차관을 지냈다. 또한, 1949년 외무부 장관서리가 되어 한국의 UN가입을 신청하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