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곤릉 ( )

고려시대사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2대 강종의 왕비 원덕태후 유씨의 능.
이칭
약칭
곤릉(坤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석실묘
건립 시기
고려 후기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원덕태후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사적(1992년 03월 10일 지정)
소재지
인천 강화군 양도면
내용 요약

강화 곤릉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2대 강종의 왕비 원덕태후 유씨의 능이다. 강화 천도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지하식 석실과 12각 호석, 정자각 등 고려시대 능제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었으며 석실 안팎에서 청자사자삼족향로를 비롯해 당·송대 동전과 관정, 철정, 금동장식품, 구슬, 동곳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13세기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 후기 제22대 강종의 왕비 원덕태후 유씨의 능.
건립 경위

고려 강종(康宗)의 왕비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의 능이다. 1239년(고종 26)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종은 왕비가 2명이었는데 제1비인 사평왕후(思平王后) 이씨는 이의방의 딸로 부친이 살해되자 주17되고 유씨가 주18가 되었다. 강종과 원덕태후는 외사촌 관계이다. 1212년 강종이 즉위하고 연덕궁주(延德宮主)에 봉해졌다. 이후 고종을 낳았고 1239년(고종 26) 5월 세상을 떠나 곤릉에 장사를 지내었고 원덕태후로 추존되었다.

변천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보수하였고, 1867년(고종 4) 능 앞에 표석을 세우는 등 관리가 이루어졌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1974년에는 주7주15이 파괴된 것을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발굴 조사를 통해 주19주20의 구조가 확인되었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1992년 3월 10일 사적 제371호로 승격되었고, 2011년 곤릉에서 강화 곤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강화 곤릉은 왕릉 정비, 복원을 위한 학술 자료 확보를 위해 2004년 강화 가릉과 함께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지하식 석실과 12각 호석, 주2 등 고려시대 능제의 전형적인 특징이 확인되었다. 석실 내부는 이미 도굴되어 자기류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입구에서 석실을 폐쇄하면서 행한 제례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사자삼족향로 등 8점의 청자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당 · 송대 동전과 관정, 주21, 금동 장식품, 구슬, 주22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형태와 특징

강화 진강산(441.3m) 동쪽으로 이어지는 덕장산 줄기의 남쪽 사면에 자리한다. 현재의 능역과 봉분은 발굴 조사 이후 복원된 것이다. 발굴 이전 곤릉의 능역은 남북 24m, 동서 1,960cm의 규모이며 석축을 이용하여 4단으로 구성하였다. 최상단에는 지름 520cm의 봉분이 있고 주위에는 ‘∩’ 형태의 주3이 둘러져 있었다. 아랫단에는 별다른 시설물이 설치되지 않았고 4단에는 난간석 등 석물을 모아 놓았다.

발굴 결과 곤릉의 능역은 3단인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최상단에는 석실이, 아랫단에는 주9 건물과 여기에 이어지는 배전(拜殿)이 확인되었다. 석실은 지하에 조성되었으며 길이 310cm, 너비 250cm, 높이 220cm 규모다. 동 · 서 · 북벽은 부정형의 깬돌을 주5로 최소 8단 이상 쌓아 올렸다. 동 · 서벽 입구 쪽 최상단과 최하단에는 사각형의 홈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인 남벽에는 문지방석과 문주석을 설치하고 바깥에 대형 판석 1매를 세워 막았다. 천정은 3매의 판석을 덮어 편평하게 조성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가운데에 막대형 석재로 관대를 설치하였다. 석실 벽면은 전반적으로 주16을 하였던 것으로 파악되나 대부분 떨어진 상태다. 석실 상부에는 지름 370cm의 12각 호석을 시설하였으며 내부를 깬돌로 채운 뒤 그 위에 봉분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호석 외곽에는 난간석이 돌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 주변에 설치되어 있던 곡장은 1974년 정비 당시 새로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능역 2단에는 동서 1,030cm, 남북 5,240cm의 정면 3칸 규모로 추정되는 정전이 확인되었다. 초석 주변 바닥에는 주10이 넓게 깔려 있다. 정전 아래에는 동서 12m, 남북 1010cm 규모로 쌓은 축대 위에 동서 740cm, 남북 880cm 규모로 건물이 시설되었다. 하단 건물지(배전)는 정전과 ‘丁’형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정자각(丁字閣)의 형태임이 밝혀졌다. 능역에서는 머리만 남은 주12 3기와 석양(石羊) 1기 등 석조물이 다수 수습되었다.

의의 및 평가

강화 천도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다. 지하식 석실과 12각 호석, 정자각 등 고려시대 능제의 전형적인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남한에서 고려 왕실의 능제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자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주13의 위상을 보여 주는 문화 유산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강도지(江都志)』

단행본

『강화의고려고분』(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강화고려왕릉』(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강화 고려도성 고고자료집』(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17)

논문

이상준, 「고려왕릉의 구조 및 능주 검토」(『문화재』 45-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기타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
주석
주1

고분 안의 돌로 된 방. 우리말샘

주2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3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5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6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7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듦. 또는 그 무덤. 우리말샘

주9

왕이 나와서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등이 있다. 우리말샘

주10

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 우리말샘

주12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 우리말샘

주13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14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하다. 우리말샘

주15

능(陵)이 있는 구역. 우리말샘

주16

석회를 바르는 일. 우리말샘

주17

작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 우리말샘

주18

황태자의 아내. 우리말샘

주19

고분 안의 돌로 된 방. 우리말샘

주20

능(陵)이 있는 구역. 우리말샘

주21

가운데로 갈수록 잘록해지는 간단한 모양의 쇠판. 삼국 시대 무덤에서 주로 나온다. 우리말샘

주22

상투를 튼 뒤에 그것이 다시 풀어지지 아니하도록 꽂는 물건. 금ㆍ은ㆍ옥ㆍ산호ㆍ밀화ㆍ나무 따위로 만드는데, 대가리가 반구형이고 끝은 뾰족하여 굽은 것과 굽지 않은 것, 또는 말뚝같이 생긴 것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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