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신령으로 된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원나라를 물리치고 강역(彊域:국경)을 회복하려 하였던 점과, 왕으로서 신하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사실이 민중의 마음에 와 닿아, 뒷날 신령으로 모셔진 듯하다. 비슷한 예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별상(別相)으로 받들어진 데서 볼 수 있다.
공민왕은 특히 동제(洞祭)와 관련하여 숭배되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동막(東幕)과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동(水洞)의 것이 그 대표로 손꼽힌다.
전자의 경우, 명덕당(明德堂)이라고 하는 목제기와건물의 네칸짜리 신당에 공민왕과 기타 다른 신령들이 무신도(巫神圖)의 형태로 모셔졌고,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동제가 베풀어졌다.
수동에는 국신당(國神堂) 또는 ‘나라당’이라 불리는 작은 신당에 공민왕 양위상(兩位像)이 목조상으로 봉안되어 있다. 옛날에는 위패만을 모셨는데, 1916년 홍수로 유실되자 이후 공민왕 부처를 신상(神像)으로 모셨다. 이 신위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한 해 걸러 동제를 열어 놀려진다.
그 밖에 서울특별시 와룡동에 있는 종묘 안에는 공민왕 신당이 있다. 이 신당은 조선 태조 4년(1395)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 및 종묘를 영건할 때 세워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그와 함께 어떤 물건이 묘정(廟庭)에 떨어져 그것을 주워보니 공민왕의 영정이었다 한다.
군신이 놀라 협의한 끝에 그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신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영정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그림으로 공민왕의 어필이라 전하며, 그밖에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그 뒤 매년 봄·가을로 종묘의 직원이 비공식으로 제례를 드렸고, 이어 인근 주민들이 치성을 올렸으나, 현재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