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문인 창의문(彰義門) 바로 앞에 있었다. 창의문의 속칭이 자하문(紫霞門)이기에 민간에서는 ‘자하문서낭’이라 불렀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기부터 중국 당송(唐宋)의 성황신왕을 본받은 고려조를 따라, 여러 산천에 성황신을 모셔 호(號)를 내리고 관(官)으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하였다.
동락정서낭[同樂亭城隍]도 이러한 신앙에서 동쪽에 자지서낭[紫芝城隍], 서쪽에 사신서낭[使臣城隍], 남쪽에 우수현서낭[牛首峴城隍]과 함께 세워졌던 것인데, 점차 무당들의 굿당으로 변하여갔다.
그리하여 조선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서울과 주변의 신당 중 무당이 가장 빈번히 찾는 곳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다. 그러나 광복 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1970년대 초에 헐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당은 세 칸의 기와건물로 천장이 얕고 당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 전면에 무신도(巫神圖)를 걸고 그 앞에는 여러 제기류를 놓아둔 제단이 있었다.
그 곳에는 서낭을 위시하여 원앙신(鴛鴦神)이라고도 불리는 동락부인(同樂夫人), 맹인신(盲人神) 등의 신령을 화본으로 모시었고, 산신(山神)과 칠원영군(七元靈君)의 신위는 지방(紙榜)의 형태를 취하였다.
특히, 원앙신의 무신도 아래쪽에는 두마리 원앙이 입맞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신령은 부부 사이를 화합시켜주는 힘이 있다 하여 부인들이 많이 찾아 기원하였다. 한편, 맹인신은 눈병을 낫게 해주는 효험이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로 된 맹인지팡이를 이 신령에게 바치고 치성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