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물산 최영 장군 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고려 후기 무신 최영 관련 사당이다. 장군사는 ‘장군님당’ 또는 ‘장군당’이라고도 불렀다. 사당의 정확한 건립 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개성의 동남쪽 교외에 있는 해발 200m 정도인 덕물산 꼭대기에 있었다. 고려 말의 충신 최영을 위시하여 그의 가족과 여러 무신(巫神)을 모신 사당이다. 덕물산 최영 장군사는 무당들이 으뜸가는 성지로 여겼다. 조선조에는 민간의 처녀를 뽑아 그곳에 살면서 장군을 모시게 한 풍속이 있었다. 광복 후 미신타파운동으로 철거되었다.
개성의 동남쪽 교외에 있는 해발 200m 정도인 덕물산 꼭대기에 있었다. 고려 말의 충신 최영을 위시하여 그의 가족과 여러 무신(巫神)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의 정확한 건립 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1년 5월 계미조(癸未條)에 왕이 예조에 명을 내려 “덕적산(德積山)을 비롯하여 몇 명산의 산신에게 축문을 지어 올리고 관을 보내어 예를 행하게 한 것은 고려조 이래의 일이다.”라고 한 바 있다. 덕적산 또는 덕수산(德水山)은 덕물산의 옛 이름이다.
덕물산에서는 예로부터 산신을 모셨는데, 최영이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처형을 당한 뒤 그의 충의와 영험이 점차 민간에 추모되어 조선 초기 그곳에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는 최영 장군 사당에 민간의 처녀를 뽑아올려 그곳에 살면서 장군을 모시게 한 풍속이 있었다. 『택리지(擇里志)』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주민들이 기도에 영험이 있기에 사당의 곁에 침실을 꾸미고 민간의 처녀를 뽑아 그곳에서 장군을 모시게 하였다 한다. 처녀가 늙거나 병이 들면 다시 처녀를 골라 바꾸었다. 그러한 여자들의 말에 의하면, 밤에 신령이 내려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혼인을 맺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 말에 이 풍습은 없어진 듯하다.
장군사는 ‘장군님당’ 또는 ‘장군당’이라고도 불렀는데, 기와 건물로 세 칸의 규모였다. 당의 한가운데 최영 장군과 그의 둘째 부인이라는 여인이 실물크기의 소상(塑像)으로 모셔지고, 오른쪽에는 장군의 딸 하나와 아들 둘, 그리고 군웅(軍雄)이 무신도(巫神圖)의 형태로 안치되었다. 왼편으로 별상(別相)이 아기의 모습으로 용상(龍床)에 자리하였다. 그 다음 오른쪽 벽에 삼불제석(三佛帝釋) · 칠성신(七星神) · 파주평산윤씨대왕(坡州平山尹氏大王) · 가망부인 · 사방천성(四方天星) ·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왼쪽 벽에는 감악산천총대왕(紺岳山天總大王) · 가망부인 · 용왕(龍王) · 용왕부인 · 송악산신(松岳山神) · 삼불제석의 무신도가 모셔졌다.
각 신령의 무신도 위쪽에는 크고 작은 청동제 명두(明斗) 혹은 명두(明圖)라 불리는 무구(巫具)가 걸려 있었다. 무신도 아래 앞쪽으로 청룡도(靑龍刀) · 삼지창(三枝槍) 등의 무구가 세워져 있고, 한쪽 구석에는 목제로 된 촛대 등의 제구(祭具)가 놓였다.
장군당의 옆에는 창부당(倡夫堂) 또는 창겨씨당이라고 불리는 신당이 있고, 마을 한가운데 쪽으로 장군의 첫째 부인을 모시는 작은 규모의 부인당(夫人堂)이 있다. 부인당 뒤편에 본향신(本鄕神)으로 모셔지는 서낭목 또는 신목(神木)이 자리하여, 무당들은 이들을 통틀어 덕물산 최영 장군당이라 하였는데, 장군당이라고 하면 이들을 포함한 복합체의 성격을 가졌다. 창겨씨당에는 붉은 칠을 한 목제 탈 4개가 모셔져 있었는데, 애기무당은 장군당에 치성을 드린 다음, 끝으로 이곳에 와 치성을 올리고 가조기로써 앞날의 무당운수를 점치기도 하였다.
덕물산 최영 장군사는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무당들이 그들의 으뜸가는 성지(聖地)로 여겨 굿을 벌였다. 그리고 내림굿을 하여 갓 무당이 된 이는 큰무당이 되기 위하여 덕물산을 찾아 장군당에서 치성을 드리고 신고하였다. 장군 사당 바로 아랫마을인 상산동(上山洞)에는 광복 때까지 40호 정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홉 집이 무당 집으로서 치성 드리러 오는 애기무당과 그밖의 단골을 맞았다.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미신타파 운동에 밀려 무당들은 쫓겨나고 당은 철거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당의 문서와 중요 자료들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가져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