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관청 수공업이 붕괴하고 민간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관공장(官工匠)이 사장(私匠)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상품 생산을 하거나, 다수의 수공업자를 고용하는 규모를 갖추기도 하였으며, 혹은 관청이나 타인에게 고용되어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장이 단독으로 생산 활동을 하였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 계(契)에 소속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장계’라는 개념을 상정할 수 있으나, 단순히 ‘수공업자의 모임’이라는 뜻일 뿐 실제로 사용된 역사적 표현은 아니며, 생산 물품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의 계가 형성되곤 하였다. 한편 시전(市廛)이나 공계(貢契)에 수공업자가 고용되어 있던 경우에 대해서도 수공업자만의 독립적 하부 조직이 있었다면, 이를 공장계의 일종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수공업자만으로 조직된 공장계 자체가 생산뿐만 아니라 판매도 총괄하는 경우가 있었다. 칼을 만드는 수공업자인 도자장(刀子匠)이나 말총을 다루는 수공업자인 총장(驄匠)과 같은 수공업자는 이른바 반공반상(半工半商)의 자유 상인으로서 시전과 경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공장계의 성장은 시전이나 공인(貢人)과 같은 특권 상인에게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즉, 수공업자는 본래 생산만 하고 제품을 판매하는 권리는 시전에게 있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고 직접 판매도 한 것이다.
『시폐(市弊)』에 따르면, 1723년에는 공조(工曹) 및 각 군문(軍門)의 모의장(毛衣匠)이 휘양[揮項]이라는 물종을 그들의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 칭하며 직접 판매하자 동상전(東床廛)에서 이를 금지하도록 평시서에 호소한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공장계와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18세기의 수공업자에게는 꽤나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야장(冶匠)이 “손으로 만들었다.”라고 하면서 임의로 사고 팔아서 징전(徵廛)이 피해를 호소한 사례도 있었고, 입장(笠匠)이 “스스로 만든” 갓인 입자(笠子)를 흑립전(黑笠廛)에 공급하지 않고 직접 판매하는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구체적인 자료가 많이 확인되지는 않으나, 공장계가 시전이나 공계와 유사한 내부 조직과 운영 방식을 가졌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19세기 중엽에 주전(鑄錢)을 맡았던 수공업자 집단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원은 일종의 매뉴팩처에 소속된 임금 노동자 신분이었는데, 이들 상호 간에 단체가 결성되어 있었다. 둘째, 일단 주전을 시작하면 구성원들은 회합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처벌을 받았다. 셋째, 단체의 운영을 위해 회비를 거두었으며, 신입 구성원이 인사치레로 납부해야 하는 금전이나 물품도 꽤나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넷째, 하늘에 대한 제사, 관우(關羽)에 대한 제사, 매월 주전을 개시할 때의 치성 등 각종 행사를 정례적으로 거행하였다. 다섯째, 구성원 자신의 작업이나 의무를 일정한 조건으로 동생이나 자식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혈연적 폐쇄성도 가지고 있었다.
한말에 러시아인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수공업자들은 개별적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드물고 단체를 결성한다고 하였고, 우두머리에게는 권한이 주어지며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한다고 했다. 이들 단체는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서 관리하고, 정부에 대해서도 상납하며, 구성원 상호 간의 부조도 행했다고 한다. 이런 단체가 바로 조선 후기 공장계의 예로부터 전해 오는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