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왕실의 물품 조달이나 제사를 담당한 각궁(各宮)에서 직제상 최상위에 있었던 직책을 가리킨다. 명례궁(明禮宮), 수진궁(壽進宮), 용동궁(龍洞宮), 어의궁(於義宮) 등 4궁[四宮]의 대차지가 전형적이다. 대차지에 대비되는 직책으로서 소차지(小次知)도 있었으며, 그냥 차지(次知)라고 하는 경우에는 대차지를 가리켰다.
관련 자료에서 명례궁당상(明禮宮堂上), 수진궁당상(壽進宮堂上) 등 당상(堂上)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 역시 대차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차지의 직책에는 내시, 즉 환관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대차지를 가리켜 중사(中使) 또는 중관(中官)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용어가 혼합되어, 차지중관(次知中官) 또는 차지내관(次知內官) 등으로 일컫는 경우도 있었다.
대차지가 각궁을 맡아서 관리하는 총책이었다면, 실무 소임(所任) 중에서 가장 높은 직책은 소차지였다. 소차지 아래에는 장무(掌務), 숙궁(稤宮), 서원(書員) 등의 소임이 있었는데, 시기에 따라 각궁의 역할이 바뀌게 되면 소임의 인적 구성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대차지를 대감(大監), 소차지를 영감(令監)이라고 부르는 것이 각궁 내부의 관행이었다. 또한 각궁의 회계 기록을 보면, 댁(宅)이라는 표현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이는 대차지의 집인 당상댁(堂上宅)을 줄여서 지칭한 것이다.
대차지와 소차지의 차이를 지위의 높고 낮음에서만 찾아서는 곤란하다. 양자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대차지가 각궁 외부의 직책인 반면, 소차지는 각궁 내부의 직책이라는 점이다. 대차지는 각궁 내부의 직제상 존재한 당상관이 아니었으며, 당상인 환관에 의해 각궁이 관할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소차지는 대차지와 달리 각궁의 내부에서 근무하였다.
그래서 대차지는 삭료를 받지 않았지만, 소차지는 삭료를 받았다. 소차지를 포함한 소임은 마치 지방 관아의 아전과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일체의 사무를 관장하거나, 재산을 관리하거나, 장부를 작성하는 등의 포괄적 업무가 소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한 실무에 대한 결재의 권한이 1차적으로는 소차지에게, 2차적으로는 대차지에게 있었던 것이다. 한편 차지나 대차지라는 표현 또는 직책은 서울의 시전 등 다른 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용례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