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던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잠저와 제17대 왕인 효종의 잠저를 일컫는 궁궐의 이름.
건립경위
인조는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제택(第宅)인 송현궁(松峴宮: 훗날의 저경궁)에서 태어나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되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혼인한 것은 1610년(광해군 2)으로, 이때부터 상어의궁(上於義宮)으로 나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변천
하어의궁(下於義宮)은 효종(孝宗, 1619~1659)이 왕자 시절 살던 궁가(宮家)로 용흥궁(龍興宮)이라고 하였다. 용흥궁이라는 이름은 1759년(영조 35)에 영조가 어의궁에 들러 「용흥구궁소지(龍興舊宮小識)」를 지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효종은 인조의 잠저(潛邸)였던 상어의궁, 즉 향교동(鄕校洞) 어의궁에서 태어났다. 인조 즉위 후 8세가 되던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631년(인조 9) 인선왕후(仁宣王后)와 가례(嘉禮)를 행하고 궐 밖으로 나와 살기 시작하였다. 하어의궁은 이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 돌아온 봉림대군이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즉위하면서 하어의궁은 본궁이 되었다. 이후 하어의궁은 국왕의 호적을 보관하며 가례를 올리는 별궁으로 기능하였다. 본궁의 기능은 1907년(융희 1) 폐지되고 제실 재산 정리국 관제(帝室財産整理局官制)에 의하여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갔다
형태와 특징
의의 및 평가
향교동 어의궁은 후대에 인조의 어휘를 봉안하는 곳으로 기능하였다. 어의동 어의궁은 효종 즉위 후 즉위하기 전 효종의 호적을 보관하며 왕실의 별궁 기능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 『승정원일기』
- 『조선왕조실록』
- 『한경지략(漢京識略)』
- 「인평대군방전도(麟坪大君坊全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단행본
- 주남철, 『궁집』(일지사, 200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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