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관 ()

제도
조선 후기, 지방의 유학교육 진흥을 위해 파견한 교관이자 교육행정 책임자.
이칭
이칭
제독관(提督官)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636년(인조 14)
공포 시기
1636년(인조 14)
시행 시기
1636년(인조 14)
폐지 시기
개항기
시행처
조선왕조
주관 부서
예조, 이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교양관은 조선 후기 지방의 유학교육 진흥을 위해 파견한 교관이자 교육행정 책임자이다. 제도 시행 초기에는 전국의 주요 행정구역에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효성 논란과 함께 폐지와 설치를 반복하다 점차 제주와 서북 지역 등 교육환경이 열악한 변방지역에만 파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796년 12월 15일자 『승정원일기』 인사 기록과 1877년 1월 30일자 실록의 기사를 보면 함경도에서는 군수, 찰방 등의 문관이 도내 여러 고을의 교양관을 겸직하는 제도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정의
조선 후기, 지방의 유학교육 진흥을 위해 파견한 교관이자 교육행정 책임자.
제정 목적

1586년(선조 19)에 중국의 제도를 본따 신설한 향교 제독관(鄕校提督官) 제도를 이어 1636년(인조 14) 5월 예조의 건의에 따라 목(牧)과 부(府) 등 큰 고을에 교관이자 교육행정 책임자로 교양관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의 제독학교관(提督學校官)과 같이 중앙에서 파견한 별도의 관원이 지방의 학교교육 및 과거(科擧) 관련 사무를 독립적으로 관할하는 지방교육 관리 체제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

내용

1636년(인조 14) 8월 1일에 마련된 「각도 교양관 응행 절목(各道敎養官應行節目)」에 따르면, 교양관은 매년 봄 · 여름이 교차할 때 속읍(屬邑)을 순력(巡歷)하고, 가을 · 겨울이 교차할 때 또한 순력하며 고강(考講)하고 제술(製述)하도록 하되, 점수를 통산하여 각 고을의 1등자를 감사에게 보고하여 따로 상을 내리고, 고강에서 연달아 두 차례 불통(不通)한 경우 군역에 배정하는 등의 교육 및 선발 업무를 수행하였다. 교양관이 파견된 큰 고을의 관할 아래에 있는 여러 고을의 경우 감사와 고을 수령이 의논하여 생원 · 진사 가운데 고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학장(學長)을 임명하여 고을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1679년(숙종 5) 10월에 마련된 「양남제독관사목(兩南提督官事目)」을 통해서도 "월봉(月俸)은 달마다 쌀 두 섬을 대동여미(大同餘米)로 주고 콩 한 섬을 회계장부에 기록된 모태(耗太)로 주며, 기타 제공하는 식품은 소재지의 관청에서 지급한다."는 등 교양관[제독관] 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변천사항

조선 후기의 교양관 제도는 1636년(인조 14) 7월 18일에 박천기(朴天琪)와 마계변(馬繼卞)이 각각 청주(淸州)와 나주(羅州)의 교양관(敎養官)에 제수되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30일 첫 교양관을 임명한 지 1개월 여만에 교양관 제도는 이듬해까지 임시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 1643년(인조 21) 6월 16일에 교양관 파견이 재개되어 김시현(金時鉉)이 정주 교양관(定州敎養官)에, 김호익(金虎翼)이 강계 · 위원 등 교양관(江界渭原等官敎養官)에 제수되었다. 김시현이 1646년(인조 24)에, 김호익이 1647년(인조 25)에 각각 정6품 전적(典籍)에 제수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교양관은 성균관승문원의 참하관 가운데서 선발해 30개월 후 임기 만료와 함께 근무 성적이 좋을 경우 6품으로 승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시행 과정에서는 ‘매번 늙고 병든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므로 학정(學政)이 착실하지 못하다.’는 등 교양관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그러던 중 1660년(현종 1) 9월 29일 송준길(宋浚吉)이 구황(救荒) 대책의 하나로 “교양관(敎養官)은 맡고 있는 임무가 중요치 않으니 우선 폐지하고, 그 지공하는 비용을 기민을 진휼하는 데 전용하는 것도 한 가지 임시 방편일 것입니다.”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그해 10월 19일에 교양관을 혁파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병조판서 홍명하(洪命夏)의 건의로 교육환경이 열악한 변경 지역인 서북(西北) 지방과 제주(濟州)에는 계속 교양관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1680년(숙종 6) 6월 3일에 교양관[제독관] 제도가 인재 양성에 실효가 없고 각 고을에서 접대하는 폐단만 끼칠 뿐이라는 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다시 혁파되었다. 그러다 그해 10월 4일 특진관 홍만용(洪萬容)이민서(李敏叙)의 의견에 따라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과 함경도 · 강원도의 경우 문관 찰방이 교양관의 직임을 겸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얼마 뒤 1682년(숙종 8) 7월 12일에는 우의정 김석주(金錫胄)의 의견에 따라 북도(北道)의 교양관을 폐지하고 북평사가 그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1796년(정조 20) 12월 15일자로 마지막 교양관 인사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 함경도 지역의 문관 4명[문천군수, 고산찰방, 북청부사, 경성판관]이 각각 안변(安邊) 등 네 고을, 영흥(永興) 등 네 고을, 홍원(洪原) 등 여섯 고을, 길주(吉州) 등 열 고을을 담당하는 교양관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실록에는 1877년(고종 14) 1월 30일 안무사 김유연(金有淵)이 ‘종성(鍾城)은 당상 문신으로, 경성(鏡城)은 당하 문신으로 차임하되 교양관을 겸직하게 해 달라.’는 장계를 올려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함경도 일부 지역에는 19세기 후반까지 당상 · 당하 문관이 교양관을 겸직하는 제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의의 및 평가

중국에서는 송대의 제거학교관(提擧學校官) 또는 제거학사(提擧學事), 원대의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 명대의 제독학교관과 같이 중앙에서 파견한 별도의 관원이 지방교육에 관한 사무를 독립적으로 관할하는 지방교육 관리 체제가 정착되어간 반면, 한국에서는 선조~인조대 이후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향교제독관, 교양관 제도를 마련하였지만 뚜렷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설치와 폐지를 반복함으로써 지방관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기존의 지역 자치적 교육 관리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참고문헌

원전

『과시등록(課試謄錄)』
『동몽예강등록(童蒙禮講謄錄)』
『비변사등록』

논문

서범종, 「17세기 조선의 교육정책과 교양관 운영에 관한 연구」(『태동고전연구』 30, 태동고전연구소, 2013)
여영기, 「『童蒙禮講謄錄』과 癸亥年 童蒙禮講節目의 再構成」(『교육사학연구』 23-1, 교육사학회, 2013)
박종배, 「중국 역대 제학관(提學官) 제도의 변천」(『교육사학연구』 20-2, 교육사학회, 2010)
최광만, 「17세기 地方敎育政策의 性格: 『課試謄錄』을 중심으로」(『교육사학연구』 18-1, 교육사학회, 2008)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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