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년(인조 7)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649년까지 각 도에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보통 도사(都事)가 겸직하도록 하였으나 때로 도내의 유능한 문관 가운데서 선임하기도 하고, 특별히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를 추천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가 실효가 없어, 1659년(효종 10)에는 성균관과 승문원의 참하관 가운데에서 가려 보내 30개월씩 근무하게 하기도 하였다.
교양관은 수시로 파견된 임시방편에 불과하였고, 정식 관제로 확립되지 못하여 그 운영에 일관성이 없었다. 함경도의 회령·경원 지역과 평안도의 청천강 이북지역에 특별히 교양관을 파견한 기록이 있어, 변경지방의 학문진흥책을 엿볼 수 있으나 그 효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