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 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편하면서 성균관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양현고를 설치, 운영하였다.
1392년(태조 1) 양현고에 2인의 판관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가 태종 때에 판관제도를 폐지하고 사(使)·승(丞)·녹사(錄事) 각 1인씩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초기에는 성균관에 딸린 2,000여결(結)의 섬학전(贍學田)을 관리하면서 유생 200명의 식량을 조달하였는데, 영조 때 편찬된『속대전』에 따르면 대폭 줄여 학전(學田) 400결로 식량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양현고의 재원은 토지와 노비였는데, 이 재원으로 학생들의 식량·등유 등의 물품조달과 석전제(釋奠祭)의 비용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실제운영에 있어 학생들의 식량도 제대로 공급하기 힘들어 어물을 별도로 공급해주기도 하고, 기거하는 학생이 많을 때는 자신이 식량을 가지고 와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종 때에는 양현고에 토지를 더 지급하여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양현고에 속한 노비는 유생의 식사와 기타 관내의 수위·사환 등 잡역을 맡았는데, 때때로 왕이 교육진흥을 위하여 노비를 하사하는 경우가 있어 약 400명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노비는 외거하게 하고 일정한 신공(身貢)을 바치게 하였으며, 그 신공으로 등유·돗자리·술·채소 등을 구입하였다.
1458년(세조 4) 대사성 이승소(李承召)의 상소에 의하면 성균관 학생 200명이 1년간 소비하는 식량이 960석인데 양현고의 수입은 600석으로서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고 한다. 관원으로 주부(主簿, 종6품) 1인, 직장(直長, 종7품) 1인, 봉사(奉事, 종8품) 1인을 두었는데, 성균관의 전적·박사·학정이 각기 겸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