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군산(群山). 현령 구희경(具希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監察) 구순(具淳), 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 어머니는 증 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이다. 여동생이 인헌왕후(仁獻王后: 元宗妃)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595년 주문사(奏聞使)인 맏형 구성(具宬)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고, 1598년에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이후 선전관(宣傳官) ·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을 거쳐 1605년 고창현감이 되었다. 1608년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해 다시 선전관이 되었고, 1619년(광해군 11)에 장연현감(長淵縣監)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또 1617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서(李曙) · 신경진(申景禛), 조카 구인후(具仁垕)와 함께 관서 지방으로 가서 반정을 모의하고 1623년에 김류(金瑬) · 이귀(李貴) · 이서 등과 합류해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주1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괄(李适)이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반드시 역모할 것을 예견하고 임금에게 아뢰어 대비하게 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난이 평정되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인헌왕후가 죽자 장사를 주관해 정헌(正憲)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 강도(江都)로 가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1629년 삼도통제사 경상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31년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인목왕후의 산릉(山陵) 및 창경궁의 수선(修繕)을 맡아서 일한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주2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공조판서로서 임금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경기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지켰다.
난이 끝난 뒤 그 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형조판서를 세 번, 공조판서를 네 번, 병조판서를 두 번이나 지냈으며, 별직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비변사(備邊司) · 훈련원 · 장악원(掌樂院) 등을 맡았다. 1637년 이후 훈련원 · 어영청(御營廳) · 포도청 · 총융청(摠戎廳)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