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굉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때, 형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인보(仁甫)
군산(群山)
시호
충목(忠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7년(선조 10)
사망 연도
1642년(인조 20)
본관
능성(綾城)
주요 관직
형조판서|공조판서|병조판서
정의
조선시대 때, 형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군산(群山). 현령 구희경(具希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監察) 구순(具淳), 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 어머니는 증 영의정 신화국(申華國)의 딸이다. 여동생이 인헌왕후(仁獻王后: 元宗妃)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5년 주문사(奏聞使)인 맏형 구성(具宬)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고, 1598년에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이후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을 거쳐 1605년 고창현감이 되었다. 1608년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해 다시 선전관이 되었고, 1619년(광해군 11)에 장연현감(長淵縣監)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또 1617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서(李曙)·신경진(申景禛), 조카 구인후(具仁垕)와 함께 관서 지방으로 가서 반정을 모의하고 1623년에 김류(金瑬)·이귀(李貴)·이서 등과 합류해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괄(李适)이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반드시 역모할 것을 예견하고 임금에게 아뢰어 대비하게 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난이 평정되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인헌왕후가 죽자 장사를 주관해 정헌(正憲)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 강도(江都)로 가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1629년 삼도통제사 경상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31년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인목왕후의 산릉(山陵) 및 창경궁의 수선(修繕)을 맡아서 일한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공조판서로서 임금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경기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지켰다.

난이 끝난 뒤 그 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형조판서를 세 번, 공조판서를 네 번, 병조판서를 두 번이나 지냈으며, 별직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비변사(備邊司)·훈련원·장악원(掌樂院) 등을 맡았다. 1637년 이후 훈련원·어영청(御營廳)·포도청·총융청(摠戎廳)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송자대전(宋子大全)』
『택당집(澤堂集)』
집필자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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