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때, 형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에 앞서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또 1617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서(李曙) · 신경진(申景禛), 조카 구인후(具仁垕)와 함께 관서 지방으로 가서 반정을 모의하고 1623년에 김류(金瑬) · 이귀(李貴) · 이서 등과 합류해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괄(李适)이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반드시 역모할 것을 예견하고 임금에게 아뢰어 대비하게 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난이 평정되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인헌왕후가 죽자 장사를 주관해 정헌(正憲)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 강도(江都)로 가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1629년 삼도통제사 경상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631년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인목왕후의 산릉(山陵) 및 창경궁의 수선(修繕)을 맡아서 일한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공조판서로서 임금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경기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지켰다.
난이 끝난 뒤 그 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형조판서를 세 번, 공조판서를 네 번, 병조판서를 두 번이나 지냈으며, 별직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비변사(備邊司) · 훈련원 · 장악원(掌樂院) 등을 맡았다. 1637년 이후 훈련원 · 어영청(御營廳) · 포도청 · 총융청(摠戎廳)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택당집(澤堂集)』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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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정사공신 책록 : 인조실록3권, 1623년(인조 1) 윤10월 18일."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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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숭록대부 가자 : 인조실록19권, 1628년(인조 6) 9월 26일. "신·구 공신 및 여러 적장들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를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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