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대율리 석조 여래 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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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
조각
유물
문화재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
정의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
내용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은 대율사의 용화전에 봉안되어 있다. 육계는 절반가량이 파손되었으나 크고 둥근 형태였음을 알 수 있으며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은 소발(素髮)이다. 얼굴은 유난히 동그란데 신체보다 머리의 비율이 커서 거대한 규모와 다르게 전반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앳된 느낌이 있다.

초승달 모양의 시원스런 눈썹과 여기에 이어지는 높고 큰 코,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는 김천 갈항사지 출토 석불좌상이나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과 같은 통일신라시대 경상도 지역에서 조성한 석불상과 유사한데, 여기서는 조금 더 경직된 그리고 풍만한 인상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은 팽창된 모습인데 양쪽 가슴의 양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통견(通肩) 가사를 걸친 어깨는 좁은 편이며, 양어깨를 이어주는 옷깃은 가슴을 지날 때는 조금 얇아지고 어깨에서는 더욱 굵어지는 띠 주름으로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오른팔은 아래로 늘어뜨려 커다란 손바닥을 편 채 바닥을 향해 있고, 왼손 역시 커다란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배 앞에 갖다 대고 있다. 이러한 수인의 모습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과 닮았다. 인체는 전반적으로 가슴에서 허리를 지나 허벅지로 내려가는 곡선으로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위에 선각으로 옷 주름을 묘사하였다. 옷 주름은 위에서 아래로 반복적으로 ‘U’자형을 그리며 드리워진 형태이다. 옷자락은 각각 깊이와 간격에 미세한 변화를 주어 경직되지 않게 처리하였는데, 이를 통해 가사 아래에 있는 인체의 양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양팔을 감싸고 있는 옷자락도 마치 휘감듯이 표현하여 팔뚝에 밀착한 형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체로 내려오는 가사 자락은 두 다리를 지나면서 끝이 끊어진 ‘U’자형 옷 주름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두 다리의 양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용화전에 봉안되어 미륵불로 인식되고 있으나 이러한 도상이 미륵불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뚜렷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 불상은 함양 마천면 마애불입상과 유사한 도상에 속하는데 이에 대해 후삼국시대에 유행했던 미륵하생신앙의 반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어서 미륵불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러한 도상은 마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좌상이 일어선 것과 같은 모습인데, 조선시대에는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하는 영산회 괘불탱의 도상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이 주목된다.

현황

광배와 대좌는 사라졌고, 현재 두 발을 별도로 조각한 대석 위에 불상이 접합되어 있다. 40여 년 전에 노승이 꿈속에서 이 불상이 땅속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파내어 절을 세웠다고도 하고, 원래 일반 주택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 불상이 발견되어 절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의의와 평가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경상도 지역에 유행했던 대형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앳되고 아담한 양식을 보여주는 개성이 강한 작품이다.

참고문헌

『국보1』(정영호 외, 예경산업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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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주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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