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일

  • 역사
  • 인물
  • 개항기
  • 현대
대한제국기 때, 이강년 의진에서 안동의 재산전투 등에 참전하며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
인물/근현대 인물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84년(고종 21)
  • 사망 연도1971년
  • 본관안동(安東)
  • 출생지충청북도 청풍
  • 관련 사건군대해산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성수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대한제국기 때, 이강년 의진에서 안동의 재산전투 등에 참전하며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청풍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한국군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던 중, 제천에서 원주로 이진하던 이강년(李康秊)의 의진(義陣)에 입대하였다.

곧, 원주로 들어가 의병을 모은 뒤, 군기고(軍機庫)를 열어 탄약과 총을 탈취, 배양산(培陽山)에 은닉하여 두었다. 뒷날 무기 등을 의진에 공급한 공으로 우군선봉장에 임명되어 제천·증평·연풍·유치산(柚峙山)·죽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908년 4월 백남규(白南奎)와 4천여 의병을 모병, 안동의 호령서벽(湖嶺西壁)에 머물던 중, 전군을 3대로 나누어 대구의 일본군이 내습했을 때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안동 재산전투(才山戰鬪)에서 이만원(李萬原)과 동구에 매복해 있다가 변복하고 내습해오던 적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의병의 피해도 적지 않아 전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6월에는 의병장 이강년이 붙잡혀 의진은 해산되었다. 뒤에 서울로 들어와 승지이던 김규흥(金奎興)·이범구(李範九)·김규철(金奎澈) 등과 모의, 고종의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출국하던 중, 일행 3명은 붙잡히고 혼자 도주, 망명하여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 『이강계창의일록(李康秊倡義日錄)』

  • - 『(영원한 의병장) 운강 이강년』(구완회, 지식산업사, 2015)

  • - 『한말(韓末)의 제천의병(堤川義兵) : 호좌의진(湖左義陣) 연구(硏究)』(구완회, 집문당, 1997)

  •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 -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 -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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