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청풍 출신.
1907년 한국군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던 중, 제천에서 원주로 이진하던 이강년(李康秊)의 의진(義陣)에 입대하였다.
곧, 원주로 들어가 의병을 모은 뒤, 군기고(軍機庫)를 열어 탄약과 총을 탈취, 배양산(培陽山)에 은닉하여 두었다. 뒷날 무기 등을 의진에 공급한 공으로 우군선봉장에 임명되어 제천·증평·연풍·유치산(柚峙山)·죽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908년 4월 백남규(白南奎)와 4천여 의병을 모병, 안동의 호령서벽(湖嶺西壁)에 머물던 중, 전군을 3대로 나누어 대구의 일본군이 내습했을 때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안동 재산전투(才山戰鬪)에서 이만원(李萬原)과 동구에 매복해 있다가 변복하고 내습해오던 적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의병의 피해도 적지 않아 전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6월에는 의병장 이강년이 붙잡혀 의진은 해산되었다. 뒤에 서울로 들어와 승지이던 김규흥(金奎興)·이범구(李範九)·김규철(金奎澈) 등과 모의, 고종의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출국하던 중, 일행 3명은 붙잡히고 혼자 도주, 망명하여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