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조선정감 ()

근세조선정감
근세조선정감
근대사
문헌
조선 후기의 학자, 박제경 · 배차산 등이 흥선대원군 집정기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저술하여 1886년에 상권이 간행된 야사서.
이칭
이칭
조선정감, 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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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박제경 · 배차산 등이 흥선대원군 집정기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저술하여 1886년에 상권이 간행된 야사서.
개설

흔히 『조선정감』, 또는 『정감』이라 약칭하기도 한다. 1만 7500여 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 헌종이 죽고 후왕을 결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항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내용

원래 상 · 하권으로 쓰여졌으나 하권은 출판되지 않았고, 상권만이 1886년 일본 동경의 중앙당(中央堂)에서 발간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필자가 갑신정변 당시 피살된 개화파 요인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하권이 다루고 있는 하한 연대는 갑신정변 직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는 이수정(李樹廷)이 쓴 서(序)이며, 둘째는 박제경(朴齊絅)이 쓴 본문이며, 셋째는 배차산(裵次山)이 각 주제 말미에 추기한 평인데, 평은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된다. 따라서, 사실상 박제경과 배차산의 공동 저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서문을 쓴 이수정은 한국 최초로 성서를 번역한 개신교의 선구자이다. 그리고 박제경의 개명(改名)은 박제형(朴齊炯)으로, 책의 내용이나 당시 개화파가 처해 있던 상황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옥균『갑신일록』에는 ‘제경(齊絅)’으로 나타나 있다. 영남의 문인이었던 배차산의 본명은 전(㙉)이며, 차산은 그의 호이다. 이것도 책 서두에 기록된 대로 ‘차산(次山)’이 아니라 ‘차산(此山)’이 맞는데, 그가 자신의 호를 바꾸어 쓴 이유는 ‘제경’이 ‘제형(齊炯)’으로 바뀐 것과 같다.

책의 내용을 보면, 박제경의 글은 주로 흥선대원군의 인물 됨됨이와 그의 정치적인 이면사를 다루고 있다. 그는 개화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을 당대의 인걸로 묘사하고 있다. 박제경이 이와 같이 대원군을 옹호한 이면에는 당시 일본인들에 의하여 왜곡된 대원군의 평가를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배차산의 평설은 주로 기독교 문명이 한국사에 있어서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개화파의 기독교관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기독교인이었던 이수정은 그의 서문에서 배차산의 기독교관이 편협하다고 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배차산은 서구 문명과 한국의 전통 문화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갈등에 대하여 상당한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박제경이나 배차산의 기본적인 태도는 서구 문물에 대해서는 친화성을 가지면서도, 기독교 문명에 대해서는 상당한 저항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대원군의 정치적 행각과 개명 문화에 대한 개화파의 고뇌를 서술한 대표적인 야사이다.

참고문헌

『근세조선정감』상(일본 중앙당, 1886)
『근세조선정감』상(이익성 역, 탐구당, 1975)
『근세조선정감』상(교회사연구소본, 교회사연구소, 1971)
「근세조선정감에 대한 몇 가지 문제」(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69)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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