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희서(希瑞), 호는 노곡(魯谷). 아버지는 김덕해(金德海)이다.
어려서는 지극한 효심으로 ‘효동(孝童)’으로 불렸으며, 커서는 완력과 담력이 세고 지략이 뛰어나 1591년 장사군관(壯士軍官)으로 뽑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순찰사 김수(金睟)의 막료로 왜적과 싸웠으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듭 패하자 고향에 돌아와 의병에 가담, 영천성(永川城)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의 전부총장(前部摠將)이 되어 경주의 적을 추격, 계연(鷄淵)에서 대파하고, 또 하빈(河濱)에 주둔한 적을 대파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의 휘하에서 울산의 적을 공격,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올랐다. 충효사(忠孝祠)에 제향되었으며, 실기인 『노곡실기(魯谷實紀)』에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