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두성(斗性), 자는 성여(成汝), 호는 이길헌(頤吉軒). 참의 김상익(金相翊)의 아들이다.
1765년(영조 41) 14세의 나이로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장녀(長女)인 청연군주(淸衍郡主)와 혼인하여 광은부위(光恩副尉)가 되었다. 『청구가요(靑邱歌謠)』에 김두성이란 이름으로 시조 2수가 전한다. 그러나 같은 시조 작품이 『악학습령(樂學拾零)』(일명 병와가곡집)에는 김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리고 ‘영조조(英祖朝)광은부위(光恩副尉)’라고 소개되어 있어 이 둘이 이명동인(異名同人)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조에 김두성, 정조대에 김기성이란 기명(記名)을 사용하고 있고, 『광산김씨세보(光山金氏世譜)』에 의하면 ‘두(斗)·기(箕)’자(字)가 같은 항렬임을 알 수 있어 동일인물임을 뒷받침한다.
실록에 의하면 김기성은 1790년(정조14)에 동지 겸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청구가요』에 김두성의 이름 아래 19수의 작품을 수록했으나 해당 작품을 다른 가집에서 확인해 보면 2수만 김두성의 작품이고 나머지 17수는 모두 박문욱(朴文郁)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구가요』의 시조작가로 소개된 김두성은 광은부위였던 김두성(김기성)과는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인물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청구가요』에 실린 작자들은 편자인 김수장과 매우 친밀했던 동료나 후배들로서 당대의 대표적 가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독 광은부위만은 이 때 겨우 10대의 어린 나이로서 가객의 반열에 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수장과 교유하던 김두성이라는 가객이 먼저 있었고 뒤에 그의 작품이 동명이인이던 광은부위 김두성(김기성)의 작품으로 와전된 것이라는 추정도 논의된 바 있다.
그의 작품 중에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듸……”라는 작품은 『악학습령』에 작자의 ‘17세작(作)’이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청구가요』가 편찬되던 시기(김수장의 나이 75∼80세 쯤)의 광은부위 김두성(김기성)의 나이와 일치한다.
이 때문에 반드시 다른 인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평가된다. 현전 작품 2수의 내용은 한벽당(寒碧堂)의 경치를 담담하게 읊은 것과 이별의 슬픔을 기러기에 부쳐 노래한 것이다.